소설 인식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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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인식의 전환[편집 | 원본 편집]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에서 문하의 주류는 한문으로 이루어진 시와 문, ‘소설’은 문학의 변방에 자리했음.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까지는 ‘소설’의 범주 자체도 불분명했음. 이 시기의 소설은 서사물과 단편적인 기사를 포괄하여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예) 16세기 어숙권: 시화잡록, 골계전, 소화집, 기행문, 지리지 등을 모두 ‘소설’로 칭함.

18세기 전반 이전부터는 이전까지 불분명했던 소설 범주가 확립되었다.

예) 낙서 윤덕희(1774년, 1762년 작성): 소설 서목 2종 <p. 36>

: 총 128종의 작품 중 오늘날의 소설 개념과 차이 나는 것은 ‘문언소설’로 분류된 4~5종, ‘기타‘ 5종 및 ‘희곡’ 4종 등 15종 안팎에 불과.

어숙권에서 윤덕희에 이르는 200년 사이에 소설의 범주가 특정한 서사 형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지게 된 것. 이에 기반하여 본다면 17세기는 소설이 나름의 형식을 확립해가면서 독자층을 확대해 나가는, 일종의 ‘정체성 확립’의 시기로 볼 수 있을듯.

윤덕희의 소설 목록을 통해 보면 16세기 후반 이후 연의소설, 재자가인소설, 염정소설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소설이 대량 유입됨으로써 조선에서 ‘소설’의 주류가 이미 교체되었음을 알려줌. 즉, 이전까지 전기소설과 나란히 위치했던 시화잡록 등의 여러 서사물이 배제되고 애정전기의 계승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재자가인소설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형식들이 새로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게 됨. -> 이에 따라 소설 범주도 자연히 바뀐 것으로 보임.

16세기 후반 이래 중국 소설의 대량 유입이 상층 지식인의 서설 범주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고, 한문소설, 백화소설 및 희곡의 번역과 번안, 국문소설의 연이은 창작은 이러한 범주 인식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것에 영향을 주었을 것.

-> 이로 인해 소설은 소수의 사대부가 향유하는 고급문학 형식에서 전시대에 비해 좀 더 ‘대중적인’ 문학 형식으로 탈바꿈됨.

소설 인식의 변화[편집 | 원본 편집]

‘소설 배격론’: 흔히 전근대시기 소설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이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상층 사대부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좀 더 복합적인 생각을 가지고 소설에 대한 적극적 대응에 나섰던 것으로 보임.

  • 18세기 중반 이후의 ‘소설 배격론’: 소설의 효용과 사회적 파급력에 대한 구체적 인식에 바탕
  • 16세기 후반 이전의 ‘소설 배격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 제기.
  1. 소설이 사실이 아닌 허구임: 근거 없는 허구를 역사적 사실로 오해하게 만듦. 허구성 자체가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기 보다는, 허구의 주된 내용이 <설공찬전>같이 ‘윤회화복’이거나 <전등신화>같이 ‘저속하고 외설적인 남녀의 음행‘일 때 허구성은 ‘불온성’과 뒤섞여서 세도를 어지럽히게 됨.  
  2. 교화에 어긋나는 불온한 문학 형식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과는 별도로 16세기 초반부터 이미 소설의 대중적 인기와 흡인력에 착안하여 소설을 교화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음.

->  낙서거사의 <오륜전전>(1531)의 서문: 낙서거사는 <전등신화>에 실린 <취취전> 등이 국문으로 번역되어 여항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으나 그 내용이 ‘음탕하고 허탄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 <오륜전전>의 모본 역시 여항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으나 <취취전> 등과는 달리 효제충신의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비루하고 허황된 말‘과 ’음탕하고 천한 이야기‘를 고치고 없애 새로 한문 소설로 만들고 다시 국문으로 번역하였다.

* <오륜전전>: 명대의 장편 희곡 <오륜전비기>를 개작한 소설을 낙서거사가 다시 한문 문언소설로 개작하고 국문으로 번역한 작품.

->  낙서거사는 교훈적인 내용의 소설 작품을 찾아 그 속의 음탕하고 천한 대목을 삭제하고 이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널리 유포함으로써 ‘한문을 모르는 여인네‘들 까지 교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 즉, 대중적 흡인력이 강한 소설을 교화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발상이 확인됨.

이러한 생각 아래 소설의 대중성을 이용해 지배이데올로기를 전달한다는 전략이 수립되기 시작.(중국 희곡 <형차기>를 개작 번역한 <왕십붕기우기>와 <왕시봉전> 역시 이러한 전략이 본격적인 소설 창작으로 현실화 되는 과정의 과도기적 산물로 보임.)

소설을 ‘불온한‘ 것으로 보는 시각과 소설을 교화의 도구로 삼으려는 전략적 흐름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초기 장편소설‘이 탄생되었으며, 17세기 조선은 이 두 흐름이 부딪치는 격동의 시공간이었다 할 수 있음.

목적의식에 입각한 소설 창작[편집 | 원본 편집]

이러한 두 가지 흐름의 부딪침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인물이 김만중이라고 볼 수 있다. 김만중의 <서포만필>의 몇몇 구절은 김만중이 민중의 언어에 바탕한 문학, 특히 소설을 필두로 한 통속문학의 진정성과 파급력을 얼마나 잘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구운몽>은 김만중이 ‘불온한 소설’의 흐름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를 알려준다.

  • <서포만필>: “지금 사람들을 모아놓고 진수가 지은 정사 <삼국지>나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을 읽어준다면 눈물 흘리는 자가 반드시 있다고 할 수 없으리니, 이것이 통속소설을 짓는 이유이다.“

-> 통속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울고 웃게 하는 호소력이 있음. 소설이 지닌 ‘흡인력’에 주목.

16세기 이래 풍속 교화라는 명목 아래 <소학>, <삼강행실도>, <열녀전>, <여칙>, <여계>가 연이어 한글로 번역되었지만, 도덕 교과서가 큰 감흥을 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사회의 문화적 향방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상층 지식인이라면 통속 소설의 호소력과 사회적 파급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음.

김만중의 소설 창작을 소설의 ‘부정적’ 측면에 관한 인식에서 보자면,

  • 애정전기의 명편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소설이 담고 있는 ‘현실비판적’ 성격: <강도몽유록>, <달천몽유록>등의 몽유록 형식 작품과 <임진록>, <박씨전> 등 전란을 소재로 한 일부 작품에도 당대 지배층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과 상하층의 대립이 나타나있음,
  • 당대에 유행하던 명말청초 통속염정소설의 ‘음란성’

이러한 당대 소설의 경향성에 대한 대항적 의미를 지니고 <구운몽>을 창작했을 것이라고 추측. 김만중의 <구운몽> 창작이 노모의 시름을 달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있지만, 당대 정치와 문학 양 분야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김만중이라는 인물이 단지 이러한 이유만으로 소설을 창작하지는 않았을 것,

대다수의 상층 지식인이 소설에 주는 감흥에 빠져 애독자가 되거나 소설의 부정적 성격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일체의 소설을 폄하하거나 배격했던 것에 비해 김만중을 위시로한 초기 장편소설의 작자들은 소설의 긍정적 측면(대중성)을 그대로 끌어안으며 부정적 측면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소설 형식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최상층 사대부의 소설 창작은 거의 대부분 17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그 이면에는 소설을 유력한 이데올로기 유포 장치로 삼고자하는 뚜렷한 목적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