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강 국문소설 및 장편소설의 형성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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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소설을 보는 시각 - 한문소설과 국문소설

17세기 이전에는 국문소설이나 장편소설이 창작된 적이 없음, 우리 문학사에서 국문소설 및 장편소설의 창작이 이루어진 것은 17세기.

다만 16세기에 국문소설이 창작되지는 않았어도 채수의 <설공찬전>과 같이 국문으로 변역되어 유포된 소설은 존재하였음. 완전히 국문으로 창작된 소설은 17세기에 처음 나타났고, 조선 후기에는 국문소설이 소설의 시대를 이끌며 대단히 성행했음.

국문소설의 등장으로 한문소설은 이전의 독점적 지위를 잃었고 주도권을 국문소설에 넘겨주었음. 그러나 한문소설은 통속적 국문소설과 다른 지향과 문제의식, 국문소설이 가지 못한 문제의식을 담지함으로써 계속 주요한 역할을 하였음. 그렇지만 표기 문자가 한문이기 때문에 독자층은 주로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소수의 지배층 남성에 국한되었다는 한계가 있음. (국문소설은 이러한 제약을 벗어나 여성과 서민을 주된 독자로 삼았음. 여성독자는 국문소설의 형성과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침.)

한문소설과 국문소설은 독자층의 차이가 있지만, 서로 교섭하며 함께 발전 하였음. 한문 소설이 국문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일도 있었음. (ex) <구운몽>, <창선감의록>)

또한 표기는 한문이나 그 지향과 문제의식이 국문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작품도 존재함. (ex) <옥루몽>, <옥수기>)

è 이러한 작품들의 경우 표기 문자는 부차적인 문제가 됨.

<홍길동전>

작자에 대한 이론이 많지만 택당 이식의 <택당집>의 잡저 <산록> 속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견주었다.“는 말을 근거로 허균이 창작한 소설인 것으로 짐작됨. 현존하는 <홍길동전>은 국문소설이기 때문에 허균이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식은 <홍길동전>을 허균이 ‘국문소설’로 지었다고는 하지 않았고, 허균은 <홍길동전> 이외에 <남궁선생전>, <장생전> 등을 한문으로 짓기도 하였음. 따라서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도 한문소설로 보아야 할듯.

<홍길동전>은 영웅소설로 간주되지만, 영웅소설과는 취미나 지향이 다름. 특히 적서 차별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영웅소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문제의식. 국문소설 <홍길동전>은 허균의 <홍길동전>과 내용 등에서 크게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  문제의식과 지향은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됨.

현존하는 <홍길동전>은 18세기 무렵~19세기 무렵에 누군가가 허균의 원작을 윤색해 국문소설로 바꾼 것으로 여겨짐. 즉,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완전히 허균의 창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이 허균의 원작에서 유래했음을 부정할 수 없음. 또한 <홍길동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이라는 주장 역시 타당하지 않음.

<천군기>

<천군기>는 황중윤이 1620년 후반부터 1630년 초반 사이에 쓴 한문 단편소설임. 황중윤은 인조반정 때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한 주화론자로 몰려 유배 갔다가 10년 후인 1633년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1648년 세상을 하직함. 이 작품은 유배 중에 창작되었음.

‘천군‘은 ’마음‘을 의미하고, ’천군기‘는 ’천군 이야기‘라는 뜻. 즉, <천군기>는 마음을 의인화한 알레고리 소설임.

16세기 조선 성리학은 이론적으로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고, 특히 성리학적 심성론에 대한 심화된 이해가 이루어졌음. <천군기>는 조선 성리학의 높은 성취를 바탕으로 성립되었고, 성리학적 심성론을 서사화한 소설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에만 있음. 이러한 점에서 <천군기>의 소설적 창안은 우리 문학사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학사에서도 주목되는 일이라 할 수 있음.

<천군기>는 욕망 때문에 잃어버린 본심을 우여곡절 끝에 되찾는다는 이야기임. 이 과정에서 ‘욕망‘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지는데, ’욕망‘이란 끈질기며 완전히 물리치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임. 인간 욕망의 면모를 핍진하게 그리고 있으며, 욕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는 작품은 우리 문학사 상 <천군기>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이루어짐.

욕망은 몸과 불가분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 황중윤은 <황정경> 과 같은 도교 경전의 상상력을 차용함. 즉, 성리학적 심성론을 근간으로 하되, 몸에 대한 도교의 상상력을 일부 끌어드리고 있는 것.

è 이 때문에 <천군기> 성리학적 심성론을 서사화하고 있으면서도 성리학과 달리 욕망을 단순화하지 않고 실제와 방불하게 그려낼 수 있었음. <천군기>의 주목할만한 성취.

<천군기> 이외에도 임제의 <수성지>(소설), 김우옹의 <천군전>(1566, 전의 형식을 취한 철리 산문, 소설 아님.) 등 천군에 대한 서사는 이전에도 있었음. 그러나 욕망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보여주지는 않음.

황중윤은 우리 문학사에 존재하는 ‘천군 서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쳔, <삼국지연의>와 같은 중국 장편소설의 창작 수법을 사용해 완전히 다른 소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음.

<천군기>는 우리 문학사 상 최초의 ‘장회소설’이기도 함. 총 31개의 장회로 구성됨.

  • 장회소설: 여러 개의 장이나 회로 구성된 소설, <삼국지연의>, <수호전>의 형식. 매 장회마다 흥미로운 제목이 붙어있고, 끝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장회를 보시라’는 취지의 말이 나와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함.

<천군기>는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군담 모티프를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함. 이후 군담 모티프는 우리 소설에서 가장 주요한 모티프의 하나로 자리잡게됨.

황중윤은 젊은 시절 성리학을 공부하였는데, 마음에 대한 성찰과 치도에 대한 우의를 담는 것이 <천군기>의 창작의도로 보임. 따라서 <천군기> 속에는 ‘군주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우의가 담겨있음.

황중윤보다 한 세대쯤 뒤의 인물인 정태제는 <천군기>를 약간 개작해 <천군연의>라고 명명하였음. 그러나 <천군기>에 비해 <천군연의>는 문제의식이 약화되었고, 문장 표현을 보수적으로 고쳐놓아 원작보다 작품성이 떨어짐.

이후 천군소설의 전통은 19세기 전반 유치구의 <천군실록>, 정기화의 <천군본기> 등으로 계승되었지만 <천군기>의 성취를 넘어서지는 못했음.

<천군기>가 장편소설의 서막을 연 작품이고, 몇 십 년쯤 후 <구운몽>, <창선감의록> 등의 장편소설이 창작되게 됨.

<사씨남정기>, <구운몽>

17세기 후반 김만중이 창작한 소설, 김만중은 인조 15년에 태어나 숙종 18년에 사망. 벌열집안 출신으로 지배층의 중심부에 있던 사람. 당색은 노론이었음. 지배층이면서도 소설의 가치를 인정하고 국문 문학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한 인물이었음.

김만중의 종손인 김춘택은 <북헌집>에 수록된 <시문을 논하다>라는 글에서

“서포는 자못 대부분 국문으로 소설을 지었다. 그중에 이른바 <남정기>라는 것은 범상한 작품들에 견줄 바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라는 기록을 남김. 이를 통해 김만중이 <사씨남정기>를 국문으로 창작하였음을 알 수 있고, 김만중이 대부분의 소설을 국문으로 창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음.

<사씨남정기>는 사씨가 남쪽으로 간 이야기라는 뜻임. 조선 후기 대부분의 국문소설이그렇듯 명나라를 배경으로 삼고 있음. 주요인물은 한림학사 유연수와 그 처인 사씨, 첩 교씨임.

<사씨남정기>는 심각한 처첩간의 갈등을 보여줌. 처첩갈등은 17세기 후반에 창작된 소설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사대부 집안 내부의 가부장제의 모순을 보여줌. 이후 국문소설, 특히 장편 국문소설의 필수적 모티프가 됨.

19세기 문인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소설변증설>이라는 글에

“<남정기>는 북헌 김춘택이 지은 것이다. (…) 북헌은 숙종 때 인현왕후가 폐비되었기에 숙종으로 하여금 그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지었다고 한다.”

라는 기록이 있음, <남정기>를 김춘택의 작이라고 한 것과 같이 여러 착오가 있는 기록이지만 (김춘택이 남정기를 한역하였기 때문에 착오가 생긴듯.) <사씨남정기>의 창작 의도를 알 수 있는 기록임.

è  <사씨남정기>의 창작의도: 인현왕후를 폐비한 일을 풍간하기 위해.

인현왕후는 숙종 15년 폐위됐다가 5년 뒤에 복위되었음. 이 사건은 세자 책봉을 둘러싼 남인과 서인의 갈등에서 기인하였기 때문에 <사씨남정기>의 창작은 숙종 연간의 당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음. 이러한 점에서 <사씨남정기<는 정치와 소설의 내적 연관을 보여주는 작품임. (당쟁이 소설의 내적 형식과 결구를 구조화하고 있기 때문에)

<사씨남정기>는 168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임. 또한 <구운몽> 역시 이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김만중이 1692년 사망하였으므로 <남정기>와 <구운몽>은 모두 김만중의 만년에 집필된 것.

<구운몽>은 선계에서 현실계로, 현실계에서 다시 선계로 넘어가는 순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환몽 구조와 결부되어 있음. 환몽 구조라는 점에서 문학사 적으로 <조신전>과 연결되는 작품인데, <조신전>은 비참한 민중의 현실을 구현하였고, <구운몽>은 부귀영화가 구현되는 귀족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생에 대한 감각이나 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대조적임.

<조신전>의 꿈 속 삶은 ‘고해‘로 귀결되지만, <구운몽>의 꿈 속 삶은 ’낙해(쾌락의 세계)‘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구운몽>은 귀족적 이상주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음.

김만중은 장희빈 일가를 비판하다가 숙종 13년 9월 유배형을 받았고, 평안도 선천에서 1년즈음 유배 생활을 하였음. 김만중 후손이 창작한 <서포연보> 속

“부군께서는 또 모친께 책을 지어 보내어 소일거리로 삼게 하셨는데, 그 뜻은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꿈속의 환상이라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고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는 기록을 통해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어머니 윤씨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창작하였음을 알 수 있음.

<구운몽>의 서두에는 양소유의 아버지 양처사가 양소유 12살 때 집을 떠나 봉래산의 선계로 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이 보이는데, 이는 아버지 없이 자란 김만중의 개인사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임. 김만중이 지극한 효심을 가졌다는 점을 보면 <서포연보>의 기록은 사실로 보임. 그러나 <서포연보>의 기록처럼 단순히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기 위한 면모도 있었으리라고 보임.

김만중은 전대의 지배적 소설 양식이었던 전기소설의 성과와 서사 문법을 잘 활용해 <구운몽>을 창작하였기 때문에 문체가 아정하고 예술적 성취가 뛰어남. <구운몽>은 후대의 국문소설, 특히 귀족적 성향의 가문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음.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많이 읽혔고, 장편소설의 작자들에게 일종의 ‘교본’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함.

(Ex) 19세기 남영로의 <옥루몽>은 구운몽의 영향을 짙게 받은 소설)

양소유의 2처 6첩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서로 화락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점이 특별함. 이를 통해 <구운몽>에서는 일부다처제가 긍정되고 있으며, 당대 상층 사대부 남성의 판타지를 그려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구운몽>은 초기 국문 장편소설로, 소설 양식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으며, 이후 창작될 국문 장편소설에 큰 영향을 주었음. 그러나 중화주의와 화의론적 세계관을 후대의 소설에게까지 답습하게 한 책임이 있음.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모두 중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외국을 배경으로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 작가의 상상력을 펼치기에 유리한 면도 있지만, 시공간을 주체적으로 전유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함. 국문소설이 시공간을 주체적으로 전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조선적 정취’룰 미적으로 전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자국의 역사, 지리, 문화, 습속에 대한 이해 결부로 이어짐. 이러한 이해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결부된다는 점에서 시공간 설정은 작은 문제가 아니게 됨.

<창선감의록>

<창선감의록>은 소설이 시작되기 전 서술자의 말이 나오고, 소설이 끝난 후에 다시 서술자의 말이 나오는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

작품 초두 서술자의 말을 통해 한문으로 창작된 소설임을 알 수 있음. “병중에 부녀자들이 낭송하는 국문소설 <원감록>을 듣고 이를 창작하였음.“ -> 원감록의 단순 한역이 아니라, 원감록을 토대로 삼아 재창작함. <창선감의록>은 ‘선을 드러내고 의에 감화되는 이야기’라는 뜻인데, 제목을 통해 도덕적 주제화를 뚜렷이 하는 방향으로 재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음.

작품 중 <시경>, <예기> 등의 유교경전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학식이 높은 사람이 썼으리라고 보임. 또한 작품 중 시가 여러 편 나오고, 편지가 빈번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전기소설에서 유래하는 수법임.

중국 명나라 가정제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당대의 권신인 엄숭 등 실존 인물을 여럿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재하고 있음.

è 실제의 역사적 사실에 기대어 허구적 상상력을 펼치는 수법. 연의소설에서 유래한 기법.

즉, <창선감의록>은 중국 전기소설과 연의소설을 많이 읽은 문인의 필치를 보여줌. 그 작자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은데, 이전에는 졸수재 조성기를 작자로 보았으나, <창선감의록> 속에는 불교와 도가 역시 받아들이는 입장이 나타나있기 때문에 성리학자인 조성기와 그 필치가 일치하지 않아 미상으로 보아야한다는 견해가 힘을 받고 있음.

<창선감의록>의 주인공인 화진은 도덕군자로, 지극한 효를 실천하는 인물임. 효와 충을 행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구운몽>의 양소유와는 차이가 있음. 또한 여주인공인 윤옥화와 남채봉도 도덕적 규범에 충실한 인물들임.

작품의 주제는 ‘권선징악’으로 표방되어 있는데, 신분에 따라 권선징악이 다르게 적용된다는 점이 주목할만 함. 악인이더라도 하층에 속한 인물만 징벌됨.

Ex) 간신 엄숭 – 작품 말미에 용서됨, 심부인, 화춘 – 개과천선, 조녀, 범한, 장평 – 엄혹한 징벌.

이러한 점에서 <창선감의록>은 사대부 본위의 신분적 차별주의가 관철되고 있다 할 수 있음.

è <창선감의록>은 사대부적 도덕 감정과 사대부적 이상주의가 구현되어 있으며, 작품은 해피앤딩으로 끝나지만, 가부장제의 모순이 해소되지는 않음.

작자는 ‘인간의 본성은 궁극적으로 선하다’라는 도덕적 낙관주의에 기초하여 소설을 썼으나, 작품의 주제와 반대로 소설에서는 심각한 모순에 처해있는 현실을 보여줌.

또, <창선감의록>은 가문 내부의 다양한 갈등을 통해 서사가 전개되고 있음. (처첩갈등, 이복형제간의 갈등, 부자 갈등, 계모와 전처소생의 갈등, 부부갈등, 동서 갈등 등) 그리고 가문 내부의 갈등과 조정 내부의 군자/소인 간의 갈등이 서로 얽혀 있음. 이러한 요소들은 가문소설의 기본 문법에 해당함. 그러나 <창선감의록>은 주인공 1대의 이야기에 해당하고 이 이후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가문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음.

è <창선감의록>은 가문소설의 기본 문법이 나타나고, 화부, 윤부, 남부, 진부 가문 간의 얽힘이 서사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가문소설과 연접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음.

소설의 뒷부분에서는 영웅소설적인 요소가 나타남.

(주인공 화진이 신인 곽선공을 만나 무술을 습득하고 대원수가 되어 남방을 평정한 다음 크게 무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부분) -> 영웅소설의 “주인공이 이인을 만나 무술과 병법을 습득한 다음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원수로 출전해 공을 세우고 돌아와 부귀공명을 누림.“이라는 서사 패턴과 일치함.

영웅소설이 18세기에 성립되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창선감의록> 뒷부분에 나타나는 이러한 서술을 강화하고 확장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현성록>

<소현성록>은 17세기 후반에 국문으로 창작되었으며 작자 미상임,

<구운몽>, <창선감의록>, <소현성록>은 모두 17세기에 창작되었으며 성립기의 장편소설이라 할 수 있음. (창작 선후관계는 알 수 없음.)

소현성록은 ‘소현성 이야기’라는 뜻. 국문소설 중 ‘~록’은 대개 사대부적 취향에 부합하는 작품으로 가문소설에 많고, ‘~전’이라는 제목의 국문소설은 영웅소설에 많음. 영웅소설과 달리 가문소설은 언어가 점잖고 품위있는데, 제목에서부터 신분적 연관이 발견된다 할 수 있음.

<구운몽>과 동일하게 <소현성록>도 상층 사대부 부녀를 염두에 두고 창작된 소설임. 또한 <소현성록>은 우리 문학사 최초의 가문소설이기도 함. (<남정기>, <창선감의록>, <구운몽> 등은 <소현성록>과 비슷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가문소설은 아님.)

  • 가문소설: 한 가문은 여러 대에 걸친 이야기, 몇몇 가문이 결혼을 통해서 서로 얽히는 이야기를 근간으로 함. 그래서 ‘~삼대록(3대의 이야기)‘, ’~양문록(두 가문의 이야기)‘와 같은 제목이 종종 있음.

<소현성록>은 본전(소현성의 일대기)과 <소씨삼대록>(소현성과 그의 자식들, 손자들의이야기) 둘로 구성되어 있음. 본전이 먼저 창작되고 이후에 <소씨삼대록>이 창작된 것으로 보임. 작자는 같을 수도 있고, 두 사람이 썼을 수도 있음.

가문소설에는 속편이나 파생작이 많음.

  •  속편: 전작에 이어지는 후속 세대의 이야기가 서술된 소설
  •  파생작: 전작의 주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이야기함.

<소현성록> 본전은 제 1대 주인공인 소현성의 이야기. 소현성은 9대독자인데다 유복자인데, 지극한 효심을 타고난 인물임. 소현성의 어머니인 양부인은 소현성과 함께 소씨 집안의 번영을 이루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로 그려짐.

소현성에게는 화부인, 석부인, 여부인 3명의 부인이 있는데, 화부인은 질투심이 약간 있는 여인, 석부인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이상적인 부인, 여부인은 질투심이 심한 악녀로 그려짐. 여부인은 질투로 인해 화부인과 석부인, 그 자식들까지 해치려고 하고, 소현성은 여부인을 친정으로 쫓아버림. 이러한 ‘악녀’의 질투심은 일부다처제에서 기인한 것이고, ‘악녀’는 곧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음.

본전에서 소현성은 소년급제하여 젊은 나이에 승상이 되고 많은 자식을 낳아 가문을 번성케한 군자로 그려짐.

<소씨삼대록>에서는 소현성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말미에 손자들의 이야기가 나옴. 소현성의 10남 5녀 중 장남 소운경, 셋째 아들 소운성, 여덟째 아들 소운명, 넷째 딸 소수빙, 다섯째 딸 소주주가 2세대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함. 서사 방식은 한 사람의 이야기 이후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나열적 서사’로 진행됨. 따라서 독자는 긴 내용의 소설이어도 이야기를 따라가며 몰입할 수 있음.

2대 주인공 중 핵심 주인공은 소운성인데, 소운성도 소현성과 마찬가지로 소년 급제하여 병부상서를 거쳐 승상의 지위에 오르게 됨. 아내 형씨 부인이 있지만, 황제의 강요로 명현 공주와 늑혼을 하게 됨. 명현공주는 질투가 심한 악녀로 묘사됨. 형씨 부인을 죽이려 하고 남편을 저주하고, 시어머니를 능멸하기까지 한 명현공주는 결국 유폐되어 생을 마감하게 됨. <소씨삼대록>에 등장하는 수많은 일화 중 명현공주에 관한 서사 부분이 가장 파란과 곡절이 많음.

<소현성록>에서 소현성의 자식과 손자는 130여명이고, 아들 열 명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고, 셋째 아들 소운성, 첫째 아들은 소운경은 승상이 되기도 함. 다섯째딸 소주주는 황후가 됨.

<소현성록>은 18세기 이래 성향한 가문소설의 근원이 되는 작품.

작품에서 제일의적으로 옹호되는 것은 사대부 가문의 질서와 법도인데, 이는 ‘가부장’에 의해 유지되고 규율됨. 상하의 위계와 남녀 차등은 선험적(경험 초월적?)인것으로 간주됨. 여성의 질투는 죄악시되고, 정숙하여야 하며 남편에게 순종하여야 함. 그래서 일부다처제가 정당화됨. 가문소설의 ‘가문적 번영’의 기저에는 가부장제와 일부다처제가 자리잡고 있음.

이러한 사대부 가문의 질서와 법도는 17세기 소설인 <남정기>, <구운몽>, <창선감의록>에서도 추구되고 있음. 그러나 <소현성록>은 이를 ‘가문’을 통해 3대에 걸쳐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짐.

<소현성록>은 사대부 가문의 질서와 법도가 갖는 가치를 소씨 가문과 왕실의 대결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