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강 탈중화주의와 새로운 세계관의 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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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주의와 화의론[편집 | 원본 편집]

중화주의: 한족이 다스리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중국 문물이 가장 우수하다는 세계관. (자민족 중심주의)

중화주의는 중화와 이적(중국 바깥의 종족과 민족)을 엄별하기 때문에 ‘화이론(華夷論)’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 중화주의와 화이론에서는 이적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 없고, 이적을 사람과 짐승의 중간 정도로 여겨 인륜과 예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봄. 따라서 이적은 중국에 복속되어야 하고, 중국 문물을 배움으로써만 야만, 미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여김.

유교의 경전들(ex) 논어)에는 중화주의와 화이론이 스며들어 있고, 따라서 우리나라의 식자들은 경전을 통해 중화주의와 화이론을 내면화하게 됨. -> 이는 자국 문화를 무시하고 중국의 문화를 추수하는 풍조를 낳음. (토풍/화풍)

중화주의는 통일신라 말경 현저해져 고려 시대에 강화됨. 그리고 조선시대때는 후대로 갈수록 강해짐. 17세기 이후에는 막강해져 교조적인 이념이 되기에 이름. (지배층에 한함.) -> 17세기 이후 이러한 경향이 생긴 것은 ‘명청교체’와 유관. 조선의 지배층(특히 서인, 노론 세력)은 중원에 청이 들어서자 중화주의와 화이론을 통치 이념으로 삼음. 이는 한족의 나라인 명에 대한 존승과 청에 대한 멸시를 표방한 것. 이를 통해 통치의 명분을 확보하고자 한 것임.

신라 말 이후 조선 후기까지 중화주의는 지속적으로 위세를 떨침. 대부분의 문인과 지식인들은 우리나라가 ‘소중화(小中華)’에 해당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중화주의나 화이론이 잘못된 세계관임을 이론적으로 논파한 사람은 없었음. (중화주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국 문화에 대한 존중을 표한 사람들은 간혹 있었음.) 이러한 상황에 18세기 후반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중화주의와 화이론에 대한 문제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이루어짐.

<의산문답>의 흥미로운 점은 사상사적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 텍스트의 자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동아시아 문학의 전통에서 바라본다면 ‘철리산문’으로 간주될 수 있음.

홍대용의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의산문답>은 홍대용의 최만년(最晩年) 저작. 홍대용은 원래 중화주의적 세계관과 보수적인 대(對)청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의 마지막에 중화주의와 화이론을 격파하는 <의산문답>을 저술함.

-수학기[편집 | 원본 편집]

홍대용은 영조 7년에 태어나 정조 7년에 사망. 홍력의 아들인데, 홍력은 단호그룹의 이인상과 절친했던 홍자의 사촌동생.

12살에 석실서원에서 수학하였음. 석실서원에서 10년 이상 주자성리학을 공부하였음. 이 기간동안 성리학 서적은 물론이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함. 이후 영조 35년 부친이 금성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곳으로 이동, 조금 떨어진 동복의 몰염정에서 과학기술자인 석당 나경적을 만나 혼천의(천문학 연구에 필요한 기기) 제작에 대해 의논함. 3년후 혼천의가 완성되어 같이 제작된 자명종과 함께 고향인 충청도 농수각에 비치하였음.

-> 이를 통해 이 무렵 홍대용이 천문학 연구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으나, 아직 대명의리론과 화의 사상을 철저히 견지했으며, 학문적으로는 주자학을 고수하였음.

-연행[편집 | 원본 편집]

홍대용은 35세(1765년)에 연경으로 가는 사신 홍억의 자제군관(子弟軍官, 부연사가 자신의 자식이나 가까운 친적을 데려가는 것. 사적인 수행원.)으로 청나라 연경에 가게 됨. 홍대용은 이듬해 북경의 유리창(서화와 골동품을 파는 곳)에서 과거를 보러 올라온 항주의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와 만나 필담을 나누며 친구가 됨. 홍대용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이들과 여러 번 만나 필담을 주고 받았고, 만나지 못할 때는 인편으로 많은 편지를 주고 받음.

-박지원과의 만남[편집 | 원본 편집]

1766년 홍대용은 고향 집으로 돌아옴, 이후 한달쯤 뒤인 6월 15일에 중국에서 항주의 선비들과 주고받았던 필담과 편지를 정리해 <간정동회우록>을 엮음. ‘간정동’은 북경의 유리창에서 항주의 선비들이 묵던 동네 이름, ‘회우록’은 친구와 만난 기록이라는 뜻.

1766년, 혹은 1767년경 박지원이 이 책에 서문을 써줌. 그리고 이 무렵 둘의 친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임. 홍대용은 박지원과의 만남을 통해 대청 인식이 바뀌고 실학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으로 보임.

-엄성에게 보낸 편지[편집 | 원본 편집]

홍대용은 귀국 후 중국인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음. 그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1766년 9월 9일 중양절에 엄성에게 보낸 편지(‘발난(發難)2조’)임. 이 편지에는 학문 및 사상과 관련된 홍대용의 질문이 첨부되어 있음. 그 내용은 몇 장이 넘어가는 긴 내용임.

의문점 중 하나는 유교에서는 삼교(유, 불, 도)가운데 불, 도를 배척하지만 이 종교에 유교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였음. -> 즉, 삼교가 회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의문 제기. 교조적인 유교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 중국에 다녀온 홍대용의 사상에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시사하는 질문임.

두번째 의문점은 양명학에 관한 것. 중국의 사상가 중에는 주자학자인데도 양명학을 배척하지 않는 이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에 관한 의문. -> 주자학을 절대화하는 태도에 대하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

‘발난(發難)’은 ‘의난(疑難, 학문적 의심)’이라고도 하는데, 홍대용의 학문법에서는 스스로 의난을 제기하고, 그 의난을 풀어가는 과정이 몹시 중요하였음.

홍대용은 중국에 다녀온 뒤 중국인 벗에게 의난을 제기했는데, 이것이 ‘주체’ 내부에서 만들어진 물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함.

-엄성의 답장[편집 | 원본 편집]

홍대용은 항주의 선비 중 엄성과 가장 가까웠음.

엄성이 홍대용의 편지를 받은 것은 1767년 가을이었고, 답장을 써서 홍대용에게 보냄. 홍대용은 이 답장을 엄성이 말라리아로 죽은 뒤 1768년 부친상 중에 받게 됨.

엄성의 편지 역시 매우 긴데, 이 편지는 홍대용의 사상적 모색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 그러나 엄성의 편지만으로 홍대용이 이전과 전혀 다른 사상을 전개하게 되었다는 ‘외인설’은 타당하지 못함. 사상 주체의 내적 요구와 궁리, 그에 따른 결단이라는 측면을 무시하거나 배제할 수 있기 때문임. 홍대용의 사상에서 ‘외인설’을 제기한 것은 일본학자가 처음. 국내 학자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음.

엄성은 이 편지에서 ‘당신은 너무 성인의 도에 구애된 것이 병폐다. 그래서 구애된 생각을 조금 깨뜨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함. 엄성이 말한 ‘성인의 도’는 좁게 보면 주자학을, 넓게 보면 유교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음. 엄성은 구체적으로 홍대용에게 ‘당신은 사장(詞章, 시문을 짓는 일)이라든지 훈고(訓告, 경전에 주석을 붙이는 것)라든지 기송(記誦, 경전의 자구를 외는 일)이라든지 이런 것은 모두 도에 해롭다고 여긴다’고 말함. 당시 편지에서 홍대용은 사장과 훈고와 기송의 학문은 모두 해롭다고 말했음. -> 경전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는 행위가 학문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며 의리의 학문을 강조한 것.

유학의 유파 중에서도 주자학이 특히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강조함, 주자학에서는 경전의 특정 구절의 올바른 의미만을 ‘의리’라고 하지 않고, 정학과 이단을 엄격하게 강조하는 태도 역시 ‘의리’로 칭하는데, 정학은 주자학, 이단은 이외의 학문을 가리킴. 즉, 주자학의 ‘의리’는 편벽되고 배타적인 면모가 있음. 그러나 홍대용이 말하는 ‘의리’는 주자학적 맥락이 아니라 주자학을 벗어난 맥락에서도 유효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됨.

홍대용의 <의산문답>의 기저에는 주자학을 벗어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정신의 ‘의리’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저술에서 사장이나 훈고, 기송에 힘쓴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과 세계의 의미를 창조적 사유 행위로 새롭게 해석해 나가고 있기 때문. -> 즉, 주자학적 맥락의 ‘의리’는 아니지만 또 다른 맥락의 의리를 중시하는 학문관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음.

엄성은 학문은 ‘의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홍대용의 생각에 반박하며 ‘사장, 훈고, 기송이 꼭 도에 해롭다고만 할 수 있느냐’며 훈고를 적극적으로 옹호함. -> 이는 한학(漢學)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있음. 한학은 고증학과 통하고, 당시 청 학계는 고증학이 지배적인 추세였음. 또 엄성은 항주의 선비였는데, 이 곳은 양명학의 자장이 강한 곳이었음. 따라서 엄성은 양명학도이면서 고증학에 침윤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음.

고증학은 ‘박학’을 중시하지만, 주자학은 고증학만큼의 박학을 추구하지는 않음. 엄성은 편지에서 주자학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음. 홍대용이 지나치게 성인의 도에 구애된다고 한 엄성의 말은 노장, 불교 등의 이단에 너무 교조적인 생각을 취하지 말고 열린 생각으로 바라보라는 의미, 그러나 양명학에도 적용되는 말이었음. 엄성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의 학자들은 불교, 노장, 양명학 등의 여러 사상을 희통하는 경향이 있었고, 엄성은 그래서 홍대용에게 ‘열린 관점에서 학문을 바라보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할 수 있었던 것.

엄성이 이러한 충고를 한 것은 홍대용이 학문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 ‘발난’이 있었기에 답변이 있는 것. -> 주체의 내적 요구에 주목해야 함.

홍대용은 이 편지를 통해 내적 계기와 외적 계기를 결합시켰다고 여겨짐. 이후 홍대용의 생각이 변하게 됨. 다만 편지를 받고 바로 그의 생각이 변화한 것은 아니고, 편지를 받은 뒤 이를 계기로 홍대용의 사상적 모색이 있었을 것으로 보임. 이후 홍대용이 ‘공관병수(公觀併受, 공정하게 여러 사상을 살펴 그 장점을 두루 받아들인다.)’라는 자신의 학문 방법론은 정립한 것은 1770년대에 와서 임. 편지 이외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김종후와의 논쟁.

 홍대용이 사상주체의 입장에서 엄성의 견해 중 무엇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중요함. 엄성은 한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지만, 홍대용은 훈고 위주의 고증학은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음. 또, 엄성의 편지에는 중화주의나 화이론에 대한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지만(홍대용이 묻지 않았기 때문에), 홍대용의 만년(晩年) 사상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의산문답>에는 ‘인물균(人物均)’이라는 세계관이 구축되어 있고, 화이론에 대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음. -> 이는 홍대용 스스로의 주체적 사고에 따른 전개라 할 수 있음. 또 엄성은 ‘공관병수’와 같은 개념은 말한 바 없지만, 홍대용은 주체 사유의 결과로 이러한 개념을 만들어 냈음.

-> 엄성이 홍대용에게 ‘아단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가질 것’을 충고하였지만, 이를 새로운 자극을 넘어 홍대용의 사유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됨. 엄성이 사유하지 못하고 있는 곳을 홍대용이 사유하고 있기 때문.

-> Ex) 엄성은 묵자(墨子, 겸애설)나 서학(西學), 양주(楊朱, 爲我說: 나를 위주로 한 사상)는 말하지 않았는데, 홍대용은 공관병수에 의거해 이들을 자신의 사유 속에 포섭하였음. (유학자들은 이단 가운데 묵자와 양주를 가장 혹독하게 비난하였음. )

홍대용은 엄성과의 지적 교류를 통해 정통과 이단에 대한 엄격한 구분을 해체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 것. 그러나 엄성의 영향으로 홍대용의 후기 사상이 결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김종후와의 논쟁[편집 | 원본 편집]

홍대용은 37세(1767년)에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3년상을 지내면서 부친의 묘막을 지킴. 이해 부친상을 당하기 전에 김종후와 논쟁이 벌어짐. 김종후는 예학을 전공하였고, 춘추 의리를 굳게 지킨 고루한 학자. 홍대용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공격하였음.

‘당신이 중국에 가서 오랑캐 선비들과 희희낙락하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는데, 조선 선비가 그래도 되는가? 더러운 오랑캐와 사귀고, 그 사람둘과 주고받은 말을 책으로 엮어 그것이 유포되어 읽히고 있다는데, 말이 되는가?’ 하며 홍대용을 비난하였음. 홍대용은 이에 반박했지만, 다시금 장문의 비난 편지가 왔고, 홍대용은 김종후의 편지를 재반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씀. 이는 <담헌서>에 실려 있는데, 보내려고 썼다가 마음이 진정되자 간단히 쓴 편지를 보냈음. (김종후가 홍대용을 사문난적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홍대용은 자신의 입장을 우려해 이를 미봉한 것.)

김종후와의 편지 왕래는 1769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때의 편지는 논쟁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은 것으로 여겨짐.

Ex) 1769년에 홍대용이 김종후에게 보낸 편지: ‘당신은 예학에 골몰하는데, 그런 것은 학문의 본령이라고 보기 어렵다. (..,) 실학이야 말로 힘써야 할 학문인데 왜 별로 시급하지 않은 예학을 학문의 본령으로 삼는가?’라는 내용. -> 이 편지를 통해 두 사람의 생각 차이가 드러나고, 당시 홍대용이 실학에 골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홍대용은 김종후와의 논쟁기인 1760년대 말에 주자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이단 사상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보여줌. 그리고 청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는 관점을 보여줌. 그러나 중화주의와 화이론에 대해서는 뚜렷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임.

-금강산 여행, 이송과의 만남[편집 | 원본 편집]

1770년(40세) 홍대용은 다시 서울로 올라오며 가을에 금강산을 여행했는데, 이때 서림 이송과 알게 됨. 이송은 소론이었으나 둘은 매우 친해졌고, 아마 깊은 생각을 나눈 것으로 추정됨. 홍대용이 죽은 뒤 이송이 쓴 묘표에 ‘공관병수’라는 말이 나옴. -> 홍대용 사상의 근본을 꿰뚫어 본 것.

홍대용의 묘지명은 박지원이 썼는데, 이송과는 다르게 중국의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내용만 나올 뿐 ‘공관병수’같은 말은 없음. -> 박지원과 홍대용은 친했으나 말년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임.

-벼슬살이, 저술[편집 | 원본 편집]

홍대용은 1774년(44세) 이위사 시직(세손인 정조를 가르치는 직위)라는 벼슬에 제수되어 처음 벼슬에 나감. 이때 세손을 가르치며 기록한 것이 <계방일기>. 계방은 익위사의 별칭.

3년 후 태인 현인 현감으로 나가고, 이듬해 1778년 이덕무, 박제가가 중국에 갈 때 이들을 소개하는 편지를 중국 삼하의 손유의에게 보냄.

2년 후 50세 때 경상도 영천 군수에 제수되고, 이 해 봄에 자제군관으로 중국에 가는 박지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손유의에게 보냄.

1783년 영천 군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옴. 이후 중풍으로 사망.

저서로는 <주해수용>(수학책), <연기>(연행록), 연기의 국문 번역작 <을병연행록>, <의산문답>이 있음. 의산문답은 정확한 저술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770년대 말에서 1780년대 초 사이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보임.

<의산문답>의 구성과 특징[편집 | 원본 편집]

1.     <의산문답>의 소설로 보는 견해: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강디드>와 비슷하다는 의견.

<의산문답>에 약간의 허구적 요소가 있으나,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이며, 문대에 해당하는 작품.

  • 문대(問對): 묻고 대답한다는 뜻. 동아시아 문학사에서 오랜 전통이 있는 글쓰기 방식. 철리산문이 많음.

<의산문답>도 철리산문의 전통을 잇는 작품. (철리산문에는 약간의 허구가 설정되기도 함.) 홍대용은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문대라는 형식을 택한 것으로 보임.

2.     <의산문답>을 우화로 보는 견해: 작품은 우화이기 때문에 홍대용의 사상이 디테일마다 표현되었다고 해석해서는 안됨. 장자와 같은 류의 우화이다.

우화에는 인격화된 동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그 행동에 풍자와 교훈을 담는 이야기이지만, <의산문답>의 실옹과 허자는 동식물이 아님. 따라서 우화라고는 할 수 없음.

<의산문답>을 장자와 같은 우언이라고 보기도 어려움. <장자>에는 이야기 하나하나에 특정 사물이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에는 비유, 은유, 알레고리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음. 그러나 이것들이 작가의 분신은 아님. 그리고 이러한 표현방식, 말하기 방식으로 작가의 사상을 전달하고 있음. 하지만 <의산문답>의 실옹은 작자의 분신이고, 허자는 조선의 주자학자 일반을 표상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젊은 시절의 홍대용이 일부분 투사되어 있음. (그러나 허자를 완벽히 홍대용의 분신이라고 보아서는 X)

-> 즉, <의산문답>은 <장자>처럼 메타포와 알레고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자의 분신(실옹)과 도학자를 표상하는 인물(허자)을 통해 작자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에 가까움.

-> 실옹와 허자는 허구적 설정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대화는 사실 사상의 ‘직설적 진술’인 것. 그래서 ‘우언적 말하기’인 <장자>와 <의산문답>의 말하기 방식에는 차이가 있음.

<의산문답>의 말하기 방식은 <성리대전(당시 조선 학자들이 많이 본 책)>에 실려 있는 북송의 철학자 소옹의 <어초문대>와 유사함. <어초문대>는 낚시꾼과 나무꾼의 대화로 이루어지는데, 이 둘은 허구적으로 설정된 인물이지만, 둘의 대화는 사상의 직설적 직술임. 따라서 <의산문답>은 동아시아적 글쓰기의 전통 속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음.

한국문학사에서 문답식 철리산문은 이른 시기에 등장해 발전해왔기 때문에 <의산문답>이 최초의 철리산문은 아님. 이규보의 <슬견설>, <문조물>, 김시습의 <청한잡저>, 장유의 <맹자와 장자의 논변>, 신경준 <소사문답> 등이 이전의 철리산문이고, <의산문답>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는 작품.

실옹과 허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의산문답>의 형식은 기존의 관점과 대치되는 관점을 개진하는 것에 적절한 형식이었을 것. 또한 새로운 사상을 계몽적 차원에서 알리거나 논쟁적으로 제시하는 것에도 유용한 것으로 보임.

<의산실언>[편집 | 원본 편집]

<의산문답>의 정확한 창작 시기는 알 수 없고, 아마 1783년 세상을 뜨기 전에 사상의 최종적 도달 국면에서 서술한 것으로 보임. 홍대용의 생전에 <의산문답>이 유포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사후에도 그 불온성으로 인해 유포되지 못한 것으로 보임. 그러나 주변 인물 중에 책을 읽은 사람이 있던 것으로 보임.

이덕무와 성대중이 만년에 쓴 글 중 중화를 상대화하며 화와 이, 주체와 타자의 평등성을 주장한 것이 있는데, <의산문답>의 영향력으로 보임.

그러나 문헌에서 <의산문답>이 확인되는 것은 19세기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언급하는 것이 최초. 이외에는 19세기 다른 언급이 없고, 일제강점기 1939년 홍대용의 문집 <담헌서>가 간행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됨.

박규수는 <의산문답>이라 하지 않고 <의산실언(實言)>이라고 하였는데, 실옹와 허자의 문답에서 실옹의 말에 강조점을 두어 ‘실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임.

<의산문답>의 세계[편집 | 원본 편집]

<의산문답>의 종결부에는 화이지분(華夷之分)에 대한 논의가 나옴.

허자가 ‘공자께서는 <춘추>를 쓰실 때 중국을 안으로 삼고, 사이(四夷)를 밖으로 삼으셨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을 엄격히 하셨는데, 지금 선생님은 인사(人事)에 의해 초래된 일이요 천시(天時)가 필시 그런 것이다.라고 하시니 이는 옳지 못한 말씀이 아닌지요?’

-> 인사(人事)에 의해 초래된 일이요 천시(天時)가 필시 그런 것이다: 중국의 쇠퇴와 오랑캐의 번성이 역사적 필연임을 긍정한 실옹의 말. 허자는 이에 반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

-> <춘추>는 중국 중심주의의 이념이 강한 경전, 중심과 주변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춘추>를 언급하고 있음. 허자의 이러한 생각은 <춘추>를 이념적 근거로 삼고 청을 깔보던 당대 조선 선비들의 일반적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

17세기 이래 조선 학계에서는 <춘추>를 바탕으로 소중화주의를 강화하고, ‘조선중화주의(중국이 오랑캐가 되었으니 조선이 중화.)’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기에 이름. -> 옛 중국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조선이 중화라는 사상이므로 중화주의의 변형된 형태일 뿐임. 또한 이러한 사상은 자기기만과 허세에 기반하고 있어 현실 감각을 결여해 허위의식을 낳게 됨.

홍대용과 김종후와의 논쟁에서 김종후도 ‘춘추대의’에 입각하여 홍대용을 비난하였었음. 김종후와 홍대용의 논쟁을 지켜보던 김이안(홍대용의 사촌형)은 <화이변>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중화와 오랑캐의 분변이라는 뜻으로 홍대용의 청에 대한 관점을 비판하고 기존의 조선중화주의의 정당성을 재확인함.

‘옛날에는 지리를 기준으로 화이를 분변해서 중국의 동쪽은 동이, 서쪽은 서이, 남쪽은 남이, 북쪽은 북이라고 하고, 그 가운데 있는 지역을 ‘중국’이라 했다. (…) 지금은 오랑캐인 청이 중국을 점령했으니 지리를 기준으로 삼을 수 없고 문화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럴 경우 중국의 예악 문물을 보존하는 예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가 중화일 수밖에 없다.’

-> 조선중화주의를 보여주는 대목.

허자의 말에 실옹은

‘(…) 하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분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각각 제 나라 사람과 친하고 제 임금을 높이며 각각 제 나라를 지키고 각각 제 풍속을 편안히 여기는 것인, 중국과 오랑캐는 하나다.’

-> 중국과 오랑캐는 하나다: 중국과 오랑캐는 우열이 없으며 평등하다는 뜻. 중화주의와 화이론의 근본적 부정.

평등적 존재론?

<의산문답>의 의의[편집 | 원본 편집]

홍대용은 생애 최만년까지 사유하며 자신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유교를 넘어 평등의 존재론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해낼 수 있었음. 이를 통해 허위적 자고자대의 태도와 왜곡된 자기 비하를 동시에 지양함으로써 본연의 자기의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됨. 이 자기의식은 대단히 반성적인 정신에 근거하며 견고한 논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어 전근대 조선 사상사 내지 정신사에서 최고의 의식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됨.

중화주의, 화의사상은 몇 천년간 동아시아를 규율해온 세계관, 이를 회의적으로 생각한 사람은 있었으나, 18세기에 홍대용이 이론적으로 이 사상의 잘못을 따지는 작업을 해냄.

<의산문답>은 사상을 논한 텍스트이지만, 실옹과 허자의 성격 창조가 뚜렷하고, 작품의 구조가 견고하고 잘 짜여 있다는 점에서 문학 작품으로써도 문제적이고 훌륭하다 할 수 있음.

또 문학과 사상의 밀접한 연관을 보여주면서 사상과 연관된 문학의 가능성을 확장해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음.

‘중국만이 주체가 아니라 일본 역시 동등한 주체다’라고 주장한 동시대 일본지식인들이 있었으나 홍대용은 이론적 사유를 통해 주체의 평등성을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중화주의를 해체하는 작업을 해냄. 이러한 방식은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음.

이러한 방식은 홍대용의 만년 학문적 모토인 ‘공관병수’에서 찾아볼 수 있음. <의산문답>은 유교 내부에 머무르지 않아서 중화주의와 화이론의 해체가 가능했던 것임. 그러나 이는 유교를 부정하고 있다는 말은 아님. 유교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사유하고 있다는 의미.

또한 홍대용이 학문의 본령이 참된 의리의 추구에 있다는 관점을 만년까지 견지한 것 역시 <의산문답>이 의론적인 성향을 띠게 하는 것에 작용했다 할 수 있음. 즉, 홍대용은 주자학을 벗어나서도 주자학의 맥락과는 다른 ‘의리지학’을 추구했다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홍대용이 거대 담론적 이론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을 적 배웠던 주자학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거대 담론적인 지향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임.


-윤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