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경제사적 배경: 독자층 형성의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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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성립 이전의 독자[편집 | 원본 편집]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의 조선 사회에서 장편소설이 널리 읽혔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함. 장편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상당 수준의 교양과 기본적인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임.

장편소설이 등장하기 이전 단계에 해당하는 전기소설 중심의 소설사에서는 이러한 의문이 불필요함. 전기소설의 작자와 독자는 대부분이 사대부였기 때문임. 이들은 개별적으로 소설을 입수하고 필사하여 소수의 인원끼리만 돌려보았을 것으로 추측됨.

좀더 적극적인 향유자들은 비슷한 성격의 단편소설을 모아 소설집을 여러 종 만들어내기도 함; <신독재전기집>, <화몽집> 등

전기소설집 및 문언소설집이 16세기 후반에 간행되며 독자층이 확대됨. 이들이 전기소설의 유행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 <전등신화>, <전등신화구해>, <금오신화>, <전등여화>, <화영집>

소설을 애독하던 상층 독자가 지방의 수령으로 있는 동안 휘하의 인력을 동원해 소설을 간행하는 것이 흔했음. <전등신화구해>가 원주 등지에서 재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존재. <오륜전전>, <왕십붕기우기> 등 16세기에 중국 희곡이 여럿 들어와 그중 일부는 한문문언소설로 개작 번역되며, 중국 소설의 유입이 가속화됨.

이때까지 소설의 독자는 대부분 한문에 능한 상층 사대부와 한문 및 백화에 능한 일부 중인층(역관)이었음. 16세기 상층 사회에서 유행한 소설은 일부 하층 사회로까지 파급됨. 일부 한문 소설과 희곡이 국문으로 번역되어 읽히기도 함; <오륜전전> 서문 “여항의 무식한 이들이 언문을 익혀 노인들이 전하는 말을 베껴 적어서는 밤낮으로 이야기”

16세기의 국문 번역은 후대의 번역과 달리 한문소설 혹은 중국 희곡의 줄거리가 구연되어 이를 다시 국문으로 옮겨 적는 방식으로 번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음; <오륜전전> 서문, <왕시봉전> 문체, <설공찬전>의 국문 번역 제목 ‘설공찬이’

구비적 성격으로 인해 문체가 세련되지 못하고 서사 전개상 여러 착종이 보인다는 점에서 당대 국문소설의 수준은 높지 않음. 그러나 초기 국문소설의 존재가 당시 상층 여성과 일부 하층 사이에서 소설 수요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줌.

중국 희곡을 개작 번역한 국문소설이 등장했다는 것이 중요함. 16세기 초까지 거의 유일한 소설 형식이었던 전기소설은 문인 지식층 외에는 온전히 향유하기 어려운 형태임. 따라서 국문으로 번역되어도 전기소설 형식 자체가 갖는 ‘배타성’은 남아있다는 문제점이 존재함.

새로운 독자층의 소설 수요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전기소설의 본원적 형식과 새로운 독자층의 요구 사이의 괴리로 중국 희곡에 관심이 생김. 악인의 음모와 선인의 고난이 그려지는 권선징악의 구도, 남녀 주인공이 겪는 혼사 장애 등 극적인 흥미 요소가 다분한 장편희곡을 단편소설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소설 형식을 만들어내는데에 기반이 됨; <형차기>

새로운 독자층이 다음 시기 ‘초기 장편소설’의 독자층으로 이어져야 함. 그러나 다음 시기 독자들이 애독하는 소설의 성격이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문제가 발생. 가장 큰 차이는 작품의 분량임. 초기 장편소설 중 가장 짧은 <구운몽>도 통상적인 단편소설의 10배에서 20배 분량에 해당함. 이는 초기 국문소설을 향유하던 것처럼 여럿이 모여 한자리에서 읽거나 들을 수 있는 분량이 아님. 장편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설 읽기의 환경이 완전히 달라짐; <소현성록>, <삼국지연의>, <봉신연의>


17세기 후반의 사회 경제 상황[편집 | 원본 편집]

17세기에 유통된 국내외 장편소설의 주된 독자는 서울에 거주하는 상층 사대부와 사대부가의 여성이었음. 김만중의 언급에 따르면 <삼국지연의>는 사대부 청년층 사이에서 역사서 대용으로 읽혔음.

17세기 소설 향유에 관한 기록이 부족하지만 상층 사대부의 문집 속에 들어가 전해진 것은 대부분 상층 사대부들의 모친이 소설의 애독자였기 때문임; 김만중, 조성기, 조태억, 권섭의 모친.

장편소설의 독자층이 모든 연령층의 사대부와 중년층 이상의 사대부가 여성으로 넓어졌으나 이는 서울 중심의 현상이었음. 최남선이 <매일신보>에 남긴 기록에 의하면 세책가가 본래 서울에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장편소설이 극성기에 도달했던 18세기 후반 이후에도 상업적인 세책가가 서울에만 존재했다면, 17세기 후반에 서울 외의 지역에서 장편소설이 읽히기는 어려움. 따라서 장편소설 향유의 사회적 토대에 대한 접근은 서울의 상층 사대부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마땅함.

서울의 인구 변화를 보면,17세기 중반까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로 인구가 줄고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음. 그러나 1669년 약 10년 사이에 인구가 2배 이상 증가함. 인구 증가의 원인으로는 서울 인근 지역이 서울로 편입된 점과 전란 후의 복구 사업이 마무리되며 출생 증가 혹은 대규모 인구 유입이 있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음.

<구운몽>은 초기 장편소설 중 창작 연대가 뚜렷한 작품으로, 1687년에서 1688년 사이에 창작되었음. 명말청초에 유행한 통속염정소설과 재자가인소설을 의식하고 지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서울에서 소설이 1669년부터 1688년 사이에 대중적 독서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음; 인선왕후 장씨와 숙명공주가 <수호전>을 돌려읽은 시기, 조성기가 모친을 위해 소설을 창작한 시기, 조태억의 모친 남원 윤씨가 <서주연의>를 필사한 시기가 겹침.

앞서 1669년 비약적인 인구 성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당대의 궁핍한 민생에 관한 기록이 많음. 기근과 역병으로 전국 인구의 1/5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상황이 처참했음을 알 수 있음.

그러나 당대의 실록에서 궁가와 벌열가를 중심으로 한 상층의 사치 풍조에 관한 기록 역시 많음. 서울로 논의의 범위를 한정지어보면 상층이 누렸던 부의 규모가 작지 않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부분임.

즉, 17세기 후반 조선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은 대다수의 하층민은 전란 이후 정체 혹은 심화되는 반면 소수 상층의 부는 늘어나는, 대비된 모습을 보임.


경화세족의 재산 축적 양상[편집 | 원본 편집]

부를 축적한 상층 중 궁가는 17세기 내내 급속하게 궁방전이 확대되는 현상을 보였음. 법률적으로는 주인 없는 땅이 맞으나 실질적으로는 농민의 소유였던 땅을 합법적으로 탈취하면서 궁방전은 면세, 면역의 혜택까지 받았음.

1623년 궁방전 하나의 규모가 수백 결이었으나 1695년 궁방전 하나의 규모가 7천여 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확장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음.

궁가에서는 토지뿐만 아니라 어염, 목장, 시장, 취철소의 이익까지도 독점하여 해당업에 종사하던 하층민을 고달프게 하였음. 이러한 과정에서 상하층 간의 극심한 갈등이 발생했을 것임.

궁가뿐만 아니라 사대부가에서도 토지 수탈이 자행되었음.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대부들이 노비보다는 토지를 통해 재산을 축적하려는 경향이 강화됨.

재지사족(= 지방 거주 사대부) 역시 중앙 관계와 꾸준히 연관을 맺으며 재산을 늘려갔음. 17세기의 고문서를 대상으로 한 연구 성과를 보면 이 시기 사대부들이 얼마나 재산 유지 및 증가에 관심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음.

경화세족(= 서울 거주 최상층 사대부)도 예외는 아님. 사관의 말에 의하면, 현직 고관인 최상층 사대부가 국가 재산을 자본으로 삼아 상인과 결탁하여 부를 축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이 말의 신빙성이 확실치는 않으나 당대 최상층 사대부의 재산 축적 양상을 가늠해보기에는 충분함.

이 시기에 상층 사대부가 노비들을 이용해 상업에 나서거나 은화를 사들여 시세 차익을 꾀하는 등 온갖 재산 축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일반화된 현상으로 여겨짐.

윤선도가 자식들에게 엄격히 장사를 금지하도록 명한 것을 보면 사대부가에서 상업에 참여하여 이익을 꾀하는 일이 당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더 큰 규모의 이익은 청나라와 일본을 잇는 중개무역을 통해 얻었음.

대사간 이원정의 상소에 따르면, 연행 사절을 따라간 조선 상인의 수레 행렬이 수십리에 걸쳐있었다는 것에서 당대 대청 무역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음.

또, 중국에서 산 물건을 왜관에 되팔았다는 데서 조선 상인이 중개무역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자 했음을, 아문에서 이자를 얻기 위한 물건의 대금을 못 받고 있다는 데서 광청에서 상인의 무역 자본을 대고 그 이익을 나눠 가졌음을 알 수 있음.

이원정은 이렇게 무역 규모가 급팽창하게 된 것에는 팔포(= 중국에 가는 사신 일행이 여비로 바꾸어 쓰기 위해 가져가는 8개의 인삼 꾸러미, 곧 홍삼 80근)법이 문란해진 것이라고 주장함.

사신 일행은 홍삼을 가져가서 중국 물건을 샀으므로 이를 ‘팔포무역’이라고 함.

현·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팔포무역에 홍삼 대신 은화를 가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음. 1인당 가져갈 수 있는 은화는 2,000냥에서 3,000냥(당상관)으로 허용되었고, 정식 사행원에 대해서만 팔포무역의 특권이 주어졌음.

그러나 팔포법이 문란해지면서 무역 특권의 허용 범위와 액수 제한이 통제되지 않았음.

역관들은 관청(상의원, 내의원, 호조,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 등)의 물품 수입을 대행하기도 했음.

호조 보고서에 기록된 무역 비용을 보면 공식적으로 큰 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음.

게다가 역관이나 상인은 관청의 묵인 아래 나라의 공금을 동원하는 편법을 사용함.

역관을 중심으로 한 사행원이 관청에서 은화를 빌려 중국의 백사를 수입해다가 왜관에 팔고 왜은으로 대출금을 상환하는 중개무역이 공식·비공식적으로 행해짐. 무역으로 얻는 순이익이 자본금의 2배 가까이 되었음.

이런 중개무역은 18세기 중반 이후 왜관 무역이 쇠퇴할 때까지 지속되며 조선의 국부 축적에 중추적인 역할을 함. 이 과정에서 무역에 관여했던 담당 관리와 역관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음을 짐작할 수 있음.

앞서 언급된 김만중, 조성기, 조태억, 권섭 집안은 모두 최상층 사대부에 속하므로 온갖 경제적 이익의 수혜자였음.

'문화 사치품'으로서의 장편소설[편집 | 원본 편집]

정리하자면, 17세기 후반 서울의 풍요와 사치는 내부적으로는 전국 각지의 하층민에 대한 수탈, 외부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을 잇는 중개무역의 이익 독점으로 인해 가능했음.

이러한 부의 축적으로 인해 서울의 상층 사대부가는 물론 그 수하의 노비들, 역관을 중심으로 한 일부 중인가에서 물질적 사치를 누리게 되었을 것임.

물질적인 풍요를 맛보면 정신적 포만감을 원하게 되는 법.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층 중에서도 상층 여성들이 여가를 보낼 유흥물을 필요로 했음. 소설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음.

1603년 선조가 『포공연의』를 부마에게 준다는 편지를 통해 소설 읽기는 17세기 초를 전후로 이미 왕실에서는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병자호란 직후의 기록을 보면 청나라 사신이 원하는 책을 교서관 관원이 잘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초 서울에서 중국 장편소설이 광범위하게 유행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다만, 왕실 친인척을 중심으로 한 최상층 내에서 주로 향유되었음.

유행이라는 것이 상층의 배타적인 취향에서 비롯되어 전 계층으로 확산된다고 하면, 소설 읽기는 일반적인 유행의 확산 과정과 흡사함.

왕실을 중심으로 한 소수 상층의 사치품이었던 소설이 서울 상층 사대부가가 급격한 부의 축적을 이루면서 서울 전역으로까지 소비 대상을 넓혔을 것임.

최상층 사대부들의 기록에 의하면 주로 그 모친들이 소설의 애독자였던 것을 알 수 있으나 독자가 중년 혹은 노년으로 한정되지는 않음.

중인층 여성으로 추측되는 ‘여항의 아낙’이 빌려 보기도 하고, 소년이었던 임영이 누이들에게 읽어달라고 하기도 했음.

이 시기 소설 독자의 범위는 상층 여성 대다수와 일부 중인 여성, 상층의 젊은 남성까지도 포괄함.

김성최의 기록에 의하면 일반적인 생각보다는 젊은 사대부도 ‘부녀’들과 함께 소설을 즐겼음.

즉, 17세기 후반의 서울에서는 상층 사대부가 여성을 중심으로 장편 소설 읽기라는 새로운 취미가 크게 유행을 했고, 일부 사대부가에서는 연령 및 성별 무관하게 온 가족이 함께 어울려 소설을 향유하는 것이 하나의 여가 문화를 이루었음.

새로운 읽을거리에 대한 욕망이 역사상 최초로 하나의 커다란 유행을 형성함.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 사신이 소설을 구해줄 것을 요구하면 즉시 응대할 수 있을 정도로 서울 상층부에서는 장편소설이 널리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음.

장편소설은 17세기 후반 서울 상층을 주요 소비 대상으로 삼은 일종의 문화 사치품으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