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강 여성 주체의 새로운 모습들
새로운 여성주체들[편집 | 원본 편집]
임윤지당, 남의유당, 이빙허각, 이사주당, 초옥, 덴동어미 등 18세기 이후 주목되는 여성 주체의 면모가 있음.
이중 임윤지당, 남의유당, 이빙허각, 이사주당은 실존하는 사대부 집안의 여성이고, 초옥은 소설 <포의교집>의 여성주인공, 덴동어미는 가사 <덴동어미화전가>의 주인공임. 초옥과 덴동어미는 미천한 신분의 여성이며 작중인물.
윤지당, 의유당, 빙허각, 사주당은 당호로, 조선에서 사대부 집안의 부녀중 존중할만 한 인물은 당호 앞에 성을 붙여 불렀음.
임윤지당[편집 | 원본 편집]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임윤지당의 본관은 풍천. 임적의 딸인데, 임적은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문인이고, 단호그룹에 속한 임매의 재종형. 윤지당에게는 오빠가 셋,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둘째 오빠인 임성주는 유명한 철학자였고 셋째 오빠 임경주는 ‘벗은 덕이 중요하지 귀천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우정론을 펼친 인물.
윤지당의 둘째 오빠 임성주는 단호그룹에 속한 인물과 교유가 있었고, 임경주는 단호그룹의 일원이었음. 따라서 윤지당도 단호그룹 부근에 존재했다 할 수 있음.
윤지당의 부친이 지방관은 역임했기 때문에 윤지당도 부친을 따라 양성, 함흥, 서울 등을 오가며 생활하였음. 여덟살 때 부친이 사망하자 전 가족이 부친이 생전 전답과 집을 마련했던 충청도 청주 근처의 옥화라는 산골 마을로 이주함. 옥화에서 지내며 임윤지당은 오빠 임성주에게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등을 배웠음. 임성주는 윤지당에게 학문적 스승이라 할 수 있었고, 다른 오빠들도 윤지당의 재능을 알아보아 함께 학문을 했음. 이 과정이 있었기에 윤지당은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음.
17살 때 윤지당은 선영이 있는 경기도 여주로 이사했고, 19살 때 신광유에게 시집갔음. 신광유는 신보의 아들. 신보는 신조와 재종간이었는데, 신소는 대명의리론자이며 실학적 지향을 지닌 학자였음.
27살 때 남편이 사망했고, 같은 해 큰 오빠가 문과에 급제함. 임명주는 탕평책을 비판했다가 영조의 격노를 사 제주도로 유배갔음. 3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다시 벼슬을 하지 못하고 1757년 사망하게 됨. 이때 윤지당은 한문으로 오빠의 제문을 지었음. 이 제문에는 큰오빠의 불우함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담겨있음.
45살 때 양 시어머니가 사망했고, 2년 뒤에는 친 시어머니가 사망함.
62살 때인 1782년에 둘째 오빠인 임성주가 윤지당이 사는 곳 주변으로 이사함. 4년을 함께 지내다가 1786년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고, 2년 뒤 생을 마감함. 나중에 윤지당은 둘째 오빠의 제문에서 이 때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음.
“저의 노후를 즐겁게 하시려고 이곳으로 오셔서 서로 의지하여 왕래했지요.”
ㅡ> 남매 간의 우애가 돈독했음을 알 수 있음.
제문에서 윤지당은 둘째 오빠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오빠가 큰 학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쓰이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음.
65살 때 손수 정리한 문집의 원고를 동생 임정주에게 보냄.
2년 뒤 양자로 들였던 신재준이 28살의 나이로 요절하였음. 아들이 갑자기 요절하자 윤지당은 슬픔이 너무 커 눈이 거의 멀지경에 이르렀었음. 아들이 죽은 지 1년째 되던 해에 제문을 지었는데
“너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기에 일 년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느냐?” 라는 구절로 시작함. 제문 전체에 윤지당의 비통하고 참혹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음.
67살에는 양자가 요절했고, 68살에는 둘째 오빠 임성주가 사망하여 충격이 컸던 윤지당은 5년 뒤 원주의 집에서 사망하게 됨.
3년 뒤인 1796년 윤지당의 문집인 <윤지당유고>가 친정 동생인 임정주와 시동생인 신광우에 의해 간행되었음. 임정주는 이 책 끝의 ‘유사’에서 자신의 누이가 ‘규중도학’이요 ‘여중군자’라고 하였음. 또한 발문에서는
“부녀들의 저술이 예로부터 많지만, 경전의 이치를 다반사처럼 논한 이런 문집은 종전에 없었다.”라고 함.
ㅡ> 전근대 시기 철학적 저술을 남긴 여성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윤지당밖에 없었음.
시동생 신광우는 <윤지당유고> 발문에서 윤지당은 ‘숙덕순유(덕망이 있는 바른 유자)’라고 했음.
“시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형수 또한 늙으셨다. (…) 비로소 형수가 학문에 있어 남모르는 공부가 있으신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매번 서로 이리말했다. 부인으로서도 저렇게 열심히 글을 보시는데 우리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ㅡ> 윤지당이 시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는 학문을 하지 못하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다시 학문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음.
-공적담론의로서의 글쓰기[편집 | 원본 편집]
윤지당의 친정은 노론 청류에 속하는 입장이었음. 따라서 윤지당 역시 노론 청류에 속했고,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며, 참신한 시각을 보이지는 못함. 그러나 여성으로서 자신의 일관된 논리를 제안하고, 국가, 정치, 역사에 대한 사유를 진지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됨.
국가, 정치, 역사는 모두 공적 담론의 영역에 속하므로, 윤지당의 글쓰기는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여성 최초의 본격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음.
허난설헌, 황진이, 이옥봉, 호연재 김씨의 일부 시에서도 공적 담론의 표출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는 본격적인 것은 아니었음. 하지만 운지당은 공적담론에 대한 여성 주체의 본격적인 글쓰기를 보여줌. -> 이러한 점에서 윤지당의 글쓰기는 여성 학자, 여성 지식인의 역사적 등장을 보여준다 할 수 있음.
<윤지당유고>에는 11편의 논(한문학 문체의 하나, 어떤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논의)이 실려 있는데, 모두 인물론에 속함. 예양, 자로, 가의, 온교, 왕안석, 악비 등 중국의 저명한 인물에 대해 논하고 있음.
이 중 <온교가 옷깃을 자르고 어머니를 떠난 것에 대해 논함>이라는 글에는 여성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음.
온교는 중국 육조시대 동진의 인물인데, 장군 육곤의 명으로 사신으로 떠나고자 하자 어머니가 못 가게 옷깃을 잡음. 온교는 옷깃을 칼로 자르고 떠남.
“구차한 공명심 때문에 어비이를 저버리고 은혜를 끊는 것을 보통 일로 여기니, 효자가 과연 이러한가? (…) 난리 통에 죽어서 어머니를 다시 뵙지 못하게 된다면 어머니가 겪ㄲ을 평생의 통한이 어떠하겠는가?”
ㅡ> 윤지당은 온교의 행위를 ‘어머니’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잘못이라고 비판함. 여성으로서의 관점이 반영된 해석.
논 뿐만 아니라 설(한문학 문체, 어떤 사안에 대한 풀이)에 해당하는 글도 6편 실려 있는데, 그 중에 5편은 철학적인 주제를, 한 편은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 이중 맨 앞에 실린 것이 <이기심성설>.
논과 설은 논리 전개를 핵심으로 삼는데, <윤지당유고>에 실린 글 중 절반이 논설이었다는 점에서 윤지당이 논리와 사변 등 추상적 능력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음. (논리와 사변은 원래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는데, 윤지당은 이러한 통념을 깨뜨린 것.)
6편의 설 중 <난세를 다스림은 인재를 얻는 데 있다라는 말에 대한 설>은 윤지당의 정치철학을 보여주는 설임. 이 설에서 윤지당은 임금과 선비가 만나 서로 힘을 합해야 백성을 편안히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임금이 자기 견해만 믿고 아첨하는 이만 좋아하며 자신의 뜻만 따르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음. 이는 당시 영조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신하를 모두 귀양보낸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여겨짐.
윤지당은 <큰오빠제문>에서도 “공(큰오빠)로 하여금 조정에 벼슬하지 않게 했다면 모르지만 벼슬하게 해 놓고서 쓰지 않은 것은 어긋난 일이다.”라면서 영조를 비판했었음.
또, <나의 도는 일관된다라는 말에 대한 설>에서 윤지당은 <논어>에서 공자가 증자에게 “나의 도는 일이관지한다“라고 한 말을 풀이하여, 천지자연의 도가 ‘일’에 해당하는 태극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음. -> 이를 통해 윤지당이 성리학자로서 사유력과 추상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철학자로서의 면모[편집 | 원본 편집]
윤지당의 이기심성론이나 경학은 주로 <중용>과 <대학>을 대상으로 함. 윤지당의 경학은 그가 주자학을 완벽히 이해했으며, 자신의 견해를 만들기도 했음을 보여줌. 하지만 주자학의 표준적인 해석을 넘어서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지님.
그러나 윤지당의 철학에서는 몇 가지가 주목됨
1. 이일분수(하나인 리가 여럿으로 나뉜다.)에서 ‘이일’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
: 하나의 리는 모든 존재의 보편적 원리를 말함. 보편성을 강조한 것은 남녀의 능력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통념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임.
‘일기’를 강조했던 임성주의 철학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
2. 남녀가 하늘에서 받은 본성에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음.
: 윤지당은 <극기복례가 인이 된다라는 말에 대한 설>에서
“내가 비록 여자지만 하늘에서 받은 성은 애초 남녀의 차이가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둘째오빠 녹문선쟁 제문>에서도
”남녀가 비록 행실은 다르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은 같답니다.“라고 말함.
<비수에 새긴 명>에서는
”힘쓰라 비수여 / 나를 여자라 여기지 말라“
-> 이를 통해 윤지당이 남자와 동등한 인간으로 여겨지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음.
=>이러한 언명들은 윤지당이 자신의 학문 행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했던 말임. 여성과 남성의 처지가 다를 뿐, 본성이 같기 때문에 여성도 학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주장을 한 것.
조선시대 성리학은 사대부 남성의 전유물이었음. 윤지당의 이러한 주장은 남성의 성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이러한 시도는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윤지당이 유일한 것으로 보임
3. 노력을 강조함
: 운지당은 ‘노력’의 의의를 극히 강조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학문에 대한 노력을 강조함.
<권학잠(학문을 권하는 잠언)>에서는 “게으르거나 방탕하지 말라 / 공부는 근면 속에서 깊어진다.“라고 하였고,
<심잠(마음을 다스리는 잠언)>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 태만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강조했음.
윤지당의 중년과 만년의 학문과 글쓰기는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음.
윤지당은 <인잠(인내의 잠언)> 서문에서 이렇게 말함
“나는 타고난 운명이 기박하였다. 네 가지 궁한 인간 부류(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가운데 셋에 해당된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스스로 위로할 길이 없다. 고금에 나처럼 박명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비록 강한 심장을 가진 장부라 할지라도 견디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여자로서 쉽게 참고 견딜 수 있겠는가?”
“오직 자신을 수양하여 하늘을 따르겠노라. (…) 어찌하면 분수를 지켜 편안할꼬? 인내가 도움이 되리. 인내는 어떻게 하나? 뜻을 독실히 세워야 하네. (…)“
ㅡ> 여기서 뜻은 의지를 말함. <인잠>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잠임. 의지를 통해 힘든 삶을 견뎌야 한다는 것.
<권학잠>에서 “달관한 자는 슬퍼하지 않고 / 지혜로운 자는 상심하지 않네”라고 한 것은 자신에게 한 말로 보임. 윤지당은 고난 속에서도 인내를 통해 달관과 지혜를 얻게 된 것으로 보임.
=>윤지당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글쓰기와 학문행위를 했으며, 의지를 통해 이러한 삶을 견디면서 사유행위를 해나갔음.
윤지당은 남성의 영역이었던 공적 영역(역사, 철학)에 뛰어들어 남성과 대등한 능력과 사변력을 보여줌. 남성적 보편성을 부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함. 이 점에서 윤지당의 글쓰기는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음.
-역사 비평가로서의 면모[편집 | 원본 편집]
윤지당은 철학자로서의 면모 뿐만 아니라 역사 비평가로서의 면모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음. 윤지당의 학문은 철학과 사학을 기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
문학사에서는 윤지당의 역사 비평적 글쓰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윤지당은 역사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역사 속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논하고 있음.
예양, 보과, 가의, 이릉, 온교, 사마온공, 왕안석, 악비 등에 대해 논하며 매 인물마다 논에 해당하는 글을 한 편씩 썼음. 예양과 보과에 대한 글은 젊을 때(오빠들과 옥화에서 학문을 할 때)쓴 글이고, 이릉, 온교, 사마온공, 왕안석, 악비에 대한 글을 중년과 만년(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쓴 글임.
이 글들은 전체적으로 단호하고 격렬하며, 비판적인 어조를 띄고 있음. 문장 역시 강개하고 기개가 있음. 논에서 윤지당은 역사적 인물을 보는 기존 견행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만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음. <예양에 대해 논하다>라는 글에서 예양이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에서 알 수 있음. 또 <이릉에 대해 논하다>라는 글에서는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참으로 개나 돼지라도 이릉이 남긴 것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음. <보과에 대해 논하다>라는 글에서는 국가의 위기에 신하는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말했고, <왕안석에 대해 논하다>에서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옳은 가에 대한 자신의 사유와 입장을 풀어내고 있음.
윤지당의 논들은 논리가 선명하고 입장이 단호함.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논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확고히 펼치고 있음. 윤지당 이전에는 여성 학자도 없었고, 역사적 인물에 대해 자신의 논을 펼친 사람이 없었음. 따라서 이는 우리 문학사에서 초유의 풍경이라 할 수 있음.
남의유당[편집 | 원본 편집]
이빙허각[편집 | 원본 편집]
이사주당[편집 | 원본 편집]
초옥[편집 | 원본 편집]
초옥은 <포의교집>의 주인공. <포의교집>이란 포의의 사귐이라는 뜻이고, 고종 3년(1866)년 즈음에 창작된 중편 분량의 한문 소설임. 작자는 정공보.
사족인 이생과 장사치의 아내인 초옥의 불륜이 주가 되는 내용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불륜을 주된 소재로 삼은 작품은 <포의교집>, <절화기담> 두 작품 뿐임.
*<절화기담>: 순조 9년(1809) 석천주인이 창작함. 희작적인 필치를 보여줌.
<포의교집>은 <절화기담>과 달리 작품에서 드러나는 메세지가 아이러니하고 매우 심각함.
시골에서 상경한 이생은 심심파적으로 초옥과 불륜관계를 맺지만, 초옥의 사랑은 목숨을 건 치열한 것이었음. 이러한 인물간의 불일치에서 심각한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됨.
초옥은 ‘포의의 사랑’(미천하고 가난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의 사귐)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꿈꾸었지만, 이생은 그렇지 않아 두 사람의 애정 행위에 불일치가 발생하게 됨.
초옥은 원래 궁가의 여종이었고, 이 때 한문, 사서를 익힐 수 있었음. 이 때문에 자신의 신분(천한 장사치의 아내)에서 벗어나 사족 남성에게 이끌린 것으로 보임. 이는 초옥이 가지게 된 교양과 지식이 자아의 해방, 사랑에 대한 정념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적 삶에 대한 동경이라는 허위의식까지 초래했음을 알 수 있게 함.
이 작품은 1866년 병인양요를 전후한 대원군 집정기 경성의 하층 사대부 사회의 분위기와 동향이 사실적으로 반영되어 있음. 이생을 필두로 한 주변인물의 의식, 행위에서는 지적 활기나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초옥으로 대변되는 하층여성에게서는 강렬한 해방의 욕구와 파토스를 발견할 수 있음. (비록 모순이 있지만)
따라서 초옥은 진정한 사랑을 찾는 새로운 여성 주체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됨.
덴동어미[편집 | 원본 편집]
<덴동어미화전가>는 덴동어미의 인생 유전을 그리고 있는 가사임.
덴동어미는 원래 중인층 집안의 여성이었으나, 남편의 죽음과 거듭되는 개가로 인해 하층의 빈민으로 전락하게 됨. 이 작품에는 하층여성의 연대가 인상적으로 제시되어 있음.
Ex) 덴동어미의 세번째 남편이 죽었을 때 -> 주막집 주인댁
덴동어미의 네번째 남편이 죽었을 때 -> 이웃집 여인
이들은 모두 슬픔에 빠진 덴동어미를 위로하고, 그의 슬픔에 깊에 공감함.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 덴동어미를 위로하면서 삶의 희망을 함께 찾으려고 하고 있음. 이러한 덴동어미 <-> 여성간의 공감과 연대는 덴동어미를 통해 또 다른 여성에게까지 확대되고 있음.
또한 <덴동어미화전가>에는 인간적 슬픔과 고통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음.
“마음 심자가 제일이라 / 단단하게 맘 잡으면 / 꽃은 절로 피는 거요 / 새는 여사 우는 거요 / 달은 매양 밝은 거요 / 바람은 일상 부는 거라. / 마음만 여사 태평하면 / 여사로 보고 여사로 듣지 / 보고 듣고 여사하면 / 고생될 일 별로 없소.“
ㅡ> 덴동어미가 거듭된 고통을 통해 사람살이의 깊은 이치와 마음 다스리는 법을 깨쳤음을 알 수 있음. 덴동어미는 고통을 겪었지만, 이로 인해 훼손되지 않고, 견뎌내면서 오히려 고통에서 자유로워짐.
덴동어미는 자신이 몇차례 개가를 했지만 팔자가 바뀌지 않았다며 젊은 아낙에게 재가 하지말라고 권유함.
ㅡ> 이 말의 시비보다는, 거듭된 고통을 겪은 덴동어미가 현재 고통을 겪고 있는 아낙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라는 것이 중요함.
<덴동어미화전가>는 여성들 간의 공감과 연대, 그리고 고난 끝의 깨달음을 얻게 된 하층 여성 주체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됨. 가혹한 운명 속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여성 주체를 통해 새로운 여성 주체성을 발견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