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강 조선의 문호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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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산문가, 박지원[편집 | 원본 편집]

박지원의 글은 형식면에서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미적 성취가 빼어남. 내용 역시 심오하고 문제적임 -> 따라서 박지원은 전근대 시기 최고의 문장가로 여겨짐. 이때 ‘문장가’=산문가.

한국고전문학사에서 문호로 꼽을 수 있는 여러 작가가 있지만, 박지원처럼 자유분방하고 기발한 산문을 써내지는 못함.

박지원의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수학기: 이양천과 단호그룹의 영향[편집 | 원본 편집]

박지원의 본관은 ‘반남(전라도 나주의 옛 지명)’, 호는 연암. 할아버지인 박필균은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냈고, 탕평에 비판적인 ‘노론’으로서의 당파성이 강한 인물이었음. 아버지는 박사유이고, 평생 벼슬을 하지 못함. 조부의 사망 이후 박지원의 집안이 곤궁해짐.

박지원은 서울 출생이고, 조부의 사망 이후 곤궁해지기는 하였지만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음. 16살 때 노론 청류(淸流)에 속하는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였음. 이보천 역시 탕평 정국에 몹시 비판적인 입장. 청년기의 박지원이 노론 청류의 입장을 갖게 된 것은 조부와 처가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임. 박지원은 장인에게 <맹자>를 배웠고, 처숙인 이양천에게 <사기>를 배움. 딱히 스승이 없던 자유로운 수학 방식이 훗날 박지원의 자유로운 글쓰기, 사상 모색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임.

박지원은 특히 처숙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 박지원이 한 평생 사마천의 <사기>에 영향을 받은 글을 썼음에서 알 수 있음. 이양천은 사마천의 문장을 최고로 여겼기 때문. 또, 이양천의 혜안과 고식(高識), 세상을 바로잡고 교정하려는 뜻에 영향을 받아 박지원의 비평가로서의 자질, 세상을 교정하고자 하는 열망이 키워질 수 있었음.

이양천은 <사기>를 중시하여 진한고문(秦漢古文)을 문학의 전범으로 삼았음.

  • 고문: 진한고문(秦漢古文: 진, 한 때의 문장을 존숭하는 입장.) / 당송고문(唐宋古文: 당, 송 때의 문장을 존숭.)

이러한 이양천의 태도는 박지원의 초년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됨. (박지원이 10대 후반~20대에 주로 쓴 9傳이 진한고문에 속함.)

박지원의 붕우론은 오륜의 붕우는 오행의 토와 같다는 논리인데, 홍낙순이 이양천에게 보낸 편지에 비슷한 말이 있음.

“오륜에서 붕우는 오행의 토와 같소, 오행은 토가 없으면 한 해의 순서를 이루지 못하고, 오륜의 붕우가 없으면 인도를 다하지 못한다오,”

->  박지원이 이양천 사망(혼인 3년 후) 이후 글을 수습해 문집을 엮는 과정에서 홍낙순의 편지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음. 따라서 박지원 초년의 우정론은 홍낙순의 붕우론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있다고 할 수 있음. 또, 단호그룹의 멤버였던 이양천을 통해 전해 들은 단호그룹의 ‘友道’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 가능.

연구자 중에는 박지원의 우정론이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음. <교우론>에서 ’벗은 제2의 나’라고 하며 벗의 중요성을 강조함.

조선 학자들은 이 책을 많이 보았는데(17세기 초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벗은 제2의 나”라는 대목이 소개되어 있기도 함.), 박지원 역시 중국인의 문집에 쓴 발문인 <회성원집> 발(跋)에서 “옛날에 벗에 대해 말한 사람은 벗을 ‘제 2의 나’라고 일컫기도 했다.”라는 말을 함.

->  이 대목이 마테로 리치의 교우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대목. 그러나 이 주장은 외적 계기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음.

->  박지원은 이미 노론계 선배들의 ‘우도’에 힘입어 우정론을 전개할 수 있었고, 마테오 리치의 말을 언급한 것은 자신의 우정론에 대한 부연과 윤색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임.

-범불안장애를 앓다.[편집 | 원본 편집]

박지원은 17살 때인 1753년 이후 수년간 마음의 병을 앓게 됨. 동아시아에서는 마음의 병을 ‘유우지질(幽憂:깊은 근심之疾)’이라고 불렀는데, 지나친 근심 걱정 때문에 발생하는 정신 질환을 가리키는 말. 박지원은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을 가정하며 굉장히 불안해하는 증상을 보였는데(ex) 아이가 엄마 젖을 빨다가 숨이 막히면 어떡하는가?), 이 때문에 박지원의 정신질환증세는 범불안장애에 가까운 것으로 보임.

박지원의 범불안장애의 기원은 처숙 이양천이 귀양 간 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임. 이양천은 영조 28년 10월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임금의 덕에 대해 간함(임금은 신하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임금은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 -> 영조의 군주로서의 면모를 비판한 것.

이후 이양천은 영조의 분노를 사서 11월 흑산도에 위리안치 되었고, 이듬해 6월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이때 얻은 병으로 고생하다가 1755년에 사망함. 박지원은 이양천이 유배 가기 전에 장가를 왔고, 자신의 19살에 이양천이 사망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이 일을 겪게 된 것.

박지원은 이양천을 몹시 따랐고, 이양천 역시 박지원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해 주었음. 또한 박지원은 어릴 때 몹시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성격이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번민과 환멸이 더해져 불안장애가 생긴 것으로 보임.

-백탑청연 시절[편집 | 원본 편집]

박지원은 32살(1768년) 때 백탑(白塔, 종로 탑골공원의 원각사탑) 부근으로 이사하는데, 이 부근에는 이덕무, 유득공, 유금, 이서구, 서상수 등이 거주하였음. 또 박지원은 이 부근에 사는 사람이 아니지만 박제가, 이희경과도 교유하였음. 이들 중 이서구를 제외하고 모두 서얼. 이들의 교유를 ‘백탑시사(白塔詩社)’라고 일컬음. 이후 이희경이 동인들의 시문과 편지들을 모아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 백탑의 맑은 인연을 담은 책)>이라는 책을 엮음. 백탑시사는 1768년부터 몇 년간 지속되었음. 박지원은 이 무렵 초년의 진한고문 추승에서 탈피하고 자신의 고유한 문학론인 ‘법고창신론’을 정립함.

또, 이 무렵 박지원은 홍대용과도 교유하면서 이전의 노론 청류의 정치적 입장(대명의리론, 북벌론)에서 벗어나 북학론, 실학에 관심을 가지게 됨. -> 사상의 전환이 일어남.

-연암협으로의 이주와 연행[편집 | 원본 편집]

41세(1777년), 장인인 이보천이 사망하고, 이듬해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주함. 연암의 호는 여기서 유래. 44세(1780년)에는 부연사 정사에 임명된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으로 연행을 하게 됨. 다음 해에는 <북학의(北學議)> 서(序)를 짓고, 1783년 <열하일기>의 초고를 탈고함. 이후에도 계속 수정, 보완작업을 함. 홍대용은 <열하일기>의 초고가 탈고된 해 사망해서 <열하일기>를 보지 못함.

-벼슬살이[편집 | 원본 편집]

박지원은 1786년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말단 벼슬에 제수됨. 박지원의 첫 벼슬.

음직: 고려시대 공신(功臣)과 5품 이상의 고급관료 자제들에게 부조(父祖)의 문음(門蔭)으로 주어진 관직.

6년 뒤 56세에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제수됨.

안의 현감에 부임한 지 1년 뒤 자신을 따르던 남공철에게 편지를 받게 되는데, 편지에는 정조의 분부가 언급되어 있었음. 정조는 문풍이 이와 같이 된 것이 박지원의 죄라고 하면서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인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다고 지적함. 이런 불순하고 잡된 글을 쓰지 말고 순수하고 바른 고문으로 글을 지어서 바치면 용서하고 문임의 벼슬을 줄 수도 있다고 하였음. -> ‘문임(文任)’은 임금의 교령이나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는 직책. 문과 급제자만이 할 수 있는 벼슬. 문과 급제자가 아닌 박지원에게 이 직책을 내리겠다고 한 것은 이례적인 발언이라 할 수 있음.

 정조는 이 무렵 문체반정(文體反正, 문체를 도로 바로 잡는다.)을 표방하였음. 정조는 조선 사대부들이 명말청초 패사소품의 영향을 받아 경박하고 방정하지 못한 글을 쓰는데, 이러한 경향을 주자학의 이념에 충실한 글인 고문(古文)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고 믿음. -> 이는 ‘주자학’으로 조선의 질서와 사대부의 정신을 바로 잡으려는 목표. 따라서 문체반정은 일종의 사상 통제 성격을 가짐.

정조가 박지원을 대상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음.

당시 천주교가 정치적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남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많았음. 노론은 이를 이용해 남인을 공격했음. 노론의 세력이 커지자 정조는 노론, 남인, 소론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남인을 보호하기 위해) 문체반정을 활용한 것. ->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주로 노론 인사를 공격함.

정조는 문체반정 때 박지원을 문책하기는 했으나, 직접 <열하일기>를 읽고 그의 문재(文才)를 좋게 생각한 것으로 보임. 그래서 박지원은 물론이고 그의 문객들도 정조의 속내를 알아차려서 분부에 매우 기뻐했다고 함. -> 정조와 박지원의 관계는 죽을 때까지 매우 좋았음.

박지원은 61세(1797년)때 충청도 면천 군수에 제수 됨. 그리고 1800년 정조 승하 후 두달 뒤인 8월에 강원도 양양 부사에 제수되나 이듬해 봄에 노병(老病)을 칭탁해 사직함. 이후 1805년 사망.

박지원의 언어 의식과 글쓰기의 혁신[편집 | 원본 편집]

박지원 글쓰기의 기저에는 특유의 언어 의식이 자리하고 있음. 박지원은 18세기 조선 지식인 가운데 언어 문제에 대해 가장 깊이 사유한 인물.

박지원에게 언어는 사물, 현실, 자연, 세계와의 관계이자 그 표현, 따라서 언어는 인식의 문제와 직결되게 됨. ->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언어는 변화하는 세계를 생생하게 포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함. (노력 없이는 변화하는 세계와 고정된 언어 간의 간극이 생기게 됨. -> 언어의 진부화와 상투화 발생, 死文子가 됨. )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사상의 혁신과 갱신과도 연결됨.

박지원은 언어의 혁신에 대해

1.      사물에 대한 사실적 관찰과 직시: <열하일기>에서 구사된 것.

-> 박지원은 사물에 대한 사실적 관찰과 직시를 통해 창조적 사물 읽기를 함으로써 언어를 쇄신해야만 창조적 글쓰기가 가능해다고 여김.

사물에 대한 사실적 관찰과 직시는 사물 본연에 다가가게 하고, 이것이 언어에 반영되어서 언어의 의미와 표정이 갱신되게 됨. / 창조적 글쓰기는 창조적 글 읽기를 통해서 가능해지는데, 창조적 글 읽기는 곧 창조적 ‘사물 읽기’를 통해서 가능해짐. (박지원은 가장 풍부하고 진실된 언어를 사물 그 자체로 여겼음.)

2.     언어의 다층적 표상에 대한 환기

: 언어는 사물이 지닌 다층적 표상을 재현해야 하며, 사물의 다층성을 제대로 환기할 때 진실성을 가지게 됨.

3.     사물이 ‘시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유의하기.

: 사물은 시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에서도 시공간의 고려가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됨. -> 이는 조선적 개별성과 조선적 정조의 강조로 연결됨. (조선의 구어, 속담, 관직 이름, 지명 등을 문장에 사용.) -> 법고창신의 존재론적, 언어철학적 근거가 여기서 마련되게 됨.

박지원은 문자 언어의 ‘진실성’과 관련해 구두 언어(현재, 여기서 사용하는 말)인 우리 말에 주목하였음. 구두 언어를 글에 수용함으로써 문자 언어(한문)을 쇄신할 수 있다고 여긴 것. 따라서 사상(事象)의 생동하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면 상말을 문장에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함. -> 새로운 미학의 창조. 미의 궁극적 기준을 아속(雅俗), 미추(美醜)가 아닌 ‘언어의 진실성’에 둔 것. 동시대 다른 문장가들과의 차이점.

4.     글쓰기의 방식

: 글쓰기의 방식은 ‘형식’에 대한 고려. 글쓰기의 방식에 대한 다각적인 고려(비유, 풍자, 해학, 반어, 알레고리 등)를 통해 언어의 혁신이 가능하다고 봄. -> 이러한 방식은 <열하일기>에서 풍부하게 구사되고 있음.

박지원은 상투성, 관습성을 넘어 상상력의 쇄신으로 기능하는 비유, 권위, 경직된 사고 등을 깨뜨리는 도구인 풍자, 해학, 반어, 알레고리 등을 사용해 산문의 글쓰기 규범을 파괴하고 새로운 산문 미학을 창조해 냈음. -> 이 때문에 ‘패관소설체’를 구사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함.

이러한 방식으로 산문 문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혼융과 창조를 꾀하고 있음. (박지원 산문의 대부분에는 의론(議論), 서사, 우언(寓言), 직서(直敍)가 뒤섞여 나타남.)

-> 산문 장르의 파괴와 혼성(混成)은 <열하일기>와 같은 거대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장르론적 기초가 됨.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박지원의 이해는 현실과 사상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서로 대응 관계에 있음. -> 사물과 유리된 진부하고 상투적인 언어가 쇄신되어야 하듯이, 경직되고 공허한 사상은 현실에 맞게 쇄신되어야 함. -> 박지원은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현실과 유리되어 대의명분만을 내세우는 현실 주자학을 비판하였음.

박지원은 언어에 대한 고도의 인식을 바탕으로 사상의 새로운 모색을 꾀함. (이는 언어로 표현되는 사상과 언어의 관련에서 기반.) 즉, 새로운 사상의 추구와 언어의 혁신을 동체로 생각함. -> 이 점이 다른 사상가와 박지원의 차이를 만듦. (다른 사상가는 언어의 혁신과는 별도로 사유를 통해서 사상의 혁신을 꾀함.)

즉, 박지원은 다른 사상가들과 달린 문학적인 글쓰기를 통해 사상을 모색해 나간 작가라고 할 수 있음. 박지원은 홍대용, 정약용 등과 달리 사상가, 학자가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사상을 모색했다는 특수성을 토대로 그의 글쓰기와 사유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

박지원 산문의 새 국면[편집 | 원본 편집]

박지원의 산문은 생애에 따라 크게 세 국면으로 나눌 수 있음.

10대 후반~20대 30대~44세 전(열하에 가기 전) 연행 이후
대표작: 9전 법고창신론에 따른 문학 창작이 이루어진 시기

대표작: <큰 누님 박씨 묘지명>, <취답운종교기>,

<수소완정하야방우기>,

<발승암기>, <관재기>, <초정집> 서, <양환집> 서

대표작: <열하일기>

->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자부심을 느낌. 그래서 스스로 앞선 글들을 평가절하하고 <열하일기>만 후세에 전해져도 족하다고 생각함. 그러나 1, 2 시기의 글 역시 박지원의 젊은 시절 진취성과 패기, 고도로 정제된 언어의식과 미의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님.

-첫 번째 국면[편집 | 원본 편집]

박지원의 9전 중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과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은 현전하지 않음.

<역학대도전>은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둑놈 이야기라는 뜻으로 당시 선비인 체하며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자를 풍자하기 위한 작품이고, <봉산학자전>은 봉산의 학자 이야기라는 뜻으로 황해도 봉산에 사는 농민이 글은 모르지만 행실이 훌륭하므로 ‘학자’라고 높인 것. 역학대도 같은 위선자를 경계하기 위해 지은 작품.

학계에서는 박지원의 현전 7전을 모두 소설로 보았지만, 7전 중 <마장전>, <예덕선생전>, <양반전>은 허구적 요소가 많은 소설이지만 이를 제외한 작품들은 ‘전’계이거나 전형적인 ‘전’에 해당.

  •  <민옹전>, <김신선전>, <광문자전>은 소설적 요소가 있긴 하더라도 ‘전’의 요소가 훨씬 강함. (창의적 성격의 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
  • <우상전>: 소설적 요소가 전혀 없는 전형적인 ‘전’

->  박지원의 9전에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전에 해당하는 것도 있음. (9전이 모두 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은 아니다.)

<마장전>은 당대 양반 사대부의 위선적인 벗 사귐을 풍자하고 있는 작품이고, <예덕선생전>은 엄항수라는 똥을 져 날라 생활하는 비천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그 사람됨이 고결함을 칭찬하고 있음. 이를 통해 고결한 척하지만 사실은 비천한 양반 사대부의 삶을 풍자하고 있음. -> 성동격서(聲東擊西)

하층민인 엄항수에 대한 도덕적 미화가 과장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민중의 입장이 아닌 사대부의 입장에서 엄향수를 그렸기 때문. 따라서 엄향수를 통해 실제 하층민 삶의 곤고함 등은 그려지지 못함. <김신선전>, <광문자전>, <우상전>, <민옹전>도 비슷한 한계를 지님. (비렁뱅이인 광문 삶의 곤공함, 김신선, 우상이 겪은 신분차별로 인한 불우감, 소외감 역시 그려내지 못함.)

->  박지원의 초기 전은 여항의 인물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 표현됐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나, 하층민의 현실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보지는 못함.

<양반전>은 양반 계급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음. 그러나 <양반전>에 등장하는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려는 서민부자’를 작자가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음. <양반전>을 통해 박지원이 풍자하고자 하는 것은 ‘사고팔 대상(양반 신분)’이 아닌 가난한 처지를 견디지 못해 ‘신분을 사고 파는 주인공 양반’임.  물론 작품 내에서 양반의 횡포가 풍자되고 있다는 점은 의의로 둘 수 있지만, 그 점으로 <양반전> 전체가 양반 신분을 부정하거나 풍자하고 있다고 확대해석 해서는 안됨.

있다 할 양반이란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고단한 삶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신분인데, 이를 넘보며 사고자 했던 부자 서민의 태도 역시 잘못된 것으로 풍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  즉, <양반전>에서는 양반 신분을 팔고자 하는 양반과 이를 사고자 하는 서민 부자를 모두 풍자하고 있는 것.

“명분과 절개를 힘써 닦지 않고, 문벌과 지체를 밑천 삼아 조상의 덕을 판다면 장시치와 뭐가 다를까?”

<양반전>의 서문, 이를 통해 박지원이 ‘양반과 장사치는 다른 존재다.’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박지원의 초기 전들은 그가 벗 사귐의 대상을 하층 신분의 인물로까지 확대하고자 했음을 보여줌. 학계에서는 이를 박지원의 우정론이 갖는 진보적 면모로 해석하는 관점이 있음. 그러나 박지원은 여항의 인물에게 친근감과 관심을 보였으나, 이를 넘어서서 진정한 ‘벗’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음. -> 박지원은 평생 신분제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벗어나려는 사유를 하지는 못했음.

초기 9전에서 박지원이 주로 말하고자 한 바는 ‘양반의 위선과 허위에 대한 비판과 풍자’라고 할 수 있음. 이를 풍자한 이유는 양반 사대부 계급의 맹성(猛省: 깊은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 즉, 박지원의 작업은 그 정도가 신랄하다고 해도 양반 사대부로서의 자기 비판과 성찰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음.

이 과정에서 여항의 인물에 대한 긍정이 이루어진 점은 소득이지만, 여항인이나 하층민에 대한 대상화에서 탈피하지는 못했음. -> 이 점에서 초기 9전에 담긴 비판적, 개혁적 사고는 한계를 가짐.

박지원이 초기 9전에서 한 작업은 기존 질서의 해체, 파괴가 아닌 ‘기존 질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음. (신분제의 해체가 아닌 제 기능을 하는 신분제의 재구축)

 실제로 박지원이 사귄 벗은 양반, 서얼이었고, 중인이나 서민은 없었음.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박지원의 ‘우정론’은 ‘썩은 선비’가 만연한 현실에 대한 환멸과 염증을 느껴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노론 청류 집단은 당시 탕평책으로 인해 선비들이 올곧은 지조를 잃어버리고 권력에 아첨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음. 박지원 초기 전에 보이는 ‘우도’의 강조는 노론 청류 집단의 문제의식과 유관하다 할 수 있음.

-두 번째 국면[편집 | 원본 편집]

박지원은 30대에 들어서면서 가난과 불우함에 시달렸고, 이 시기 작품에는 박지원의 존재 여건이 깊이 투사되어 있음.

진한고문에 대한 추승을 탈피하여 당송고문, 명말청초의 소품문(ex) 원굉도, 김성탄 등)까지 섭렵하였음. 그리고 이 셋을 받아들이고, 넘어서며 나름대로의 문학 노선을 정립하게 됨. -> ‘법고창신론’

법고창신론은 <초정집> 서(1772년 작)에 테제화 되어 있는데, 사고가 논리 정연함. 박지원은 20대 중, 후반부터 진한고문을 넘어 당송고문, 명말청초의 소품문으로 독서를 확장해나감. -> 법고창신론은 이러한 과정에서 고안된 문학론.

1768년 박지원이 쓴 <정유문집> 서 라는 글과 <초정집> 서의 내용이 거의 똑같음. 즉, 박지원의 법고창신론이 30대초에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법고창신론’에는 법고와 장신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박지원은 이론상으로나마 ‘법고’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 -> <초정집> 서에서 서얼이었던 박제가가 법고의 구심력에서 벗어나 창신으로 더 나아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음. 의식적으로 법고를 더 강조한 것으로 보임.

법고창신론에서 ‘창신’은 반드시 법고의 기초 위에서 성립될 수 있고, 법고의 견인을 받아야함. 따라서 법고를 벗어나는 행위는 긍정되지 않음.

박지원은 중국에 갈 때 <큰누님 박씨 묘지명>을 필사해 가 중국 문인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 글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임. 이러한 면모를 통해서 박지원은 이전의 문인들에게서 보기 힘들었던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큰누님 박씨 묘지명>은 짧은 묘지명이지만 기존의 묘지명과 달리 박지원과 누나들만 알고 있는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서술함. / 박지원의 누이는 생전에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고, 박지원도 당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음. -> 이 두 삶을 오버랩하며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서술방식을 사용하였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큰 울림을 낳고 있음.

->  ‘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자유롭고 솔직함. 예교에서 벗어난 서술 방식이 기존의 산문과 다른 면모.

<취답운종교기(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은 박지원이 37살 때인 1773년 경 창작된 것으로 보임. 운종교는 당시 청계천 위에 있던 서울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다리.

서울의 밤거리를 술에 취해 배회하다 새벽을 맞는 박지원, 이덕무, 이희경, 이희명, 원유진 등의 모습을 그리고 있음. -> 이들은 모두 서얼로, 불우하고 낙척한 삶을 산 인물들. 박지원 역시 백수였기 때문에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았음.

당시 점잖은 사대부들은 박지원을 파락호(행세하는 집의 자손으로 난봉을 피워 결딴난 사람)으로 여겼는데, 이러한 존재여건으로 인해 <취답운종교기>와 같은 창의적인 글을 쓸 수 있었음.

<수소완정하야방우기(소완정이 쓴 <여름날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한 글)>은 이서구가 박지원의 집에 방문하고, 박지원의 모습을 보고서 쓴 글에 대한 화답임. 이서구는 어릴 때 박지원에게 글을 배운 문생이었음.

  • 문생: 문생은 수학하고 글을 배우는 것, 문객과는 다름. (박제가, 이덕무는 박지원과 뜻과 취향이 맞고 처지가 비슷해 박지원을 추종한 것. 따라서 문생이나 제자가 아닌 문객. 종유자가 맞는 표현)

이 글은 36살 무렵 썼는데, 박지원 내면의 풍경을 잘 그려놓은 자화상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음.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힘겹게 버티고, 버티면서도 자신이 낙담하고 있음을 응시하는 내면을 그려냄. 산문 중 가장 페이소스가 드러나는 작품.

<발승암기>는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처지가 된 협객 김홍연을 그린 작품. 박지원은 협객이나 왈짜같은 여항인에 큰 관심을 보였었는데, 이는 <사기> 열전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임.

김홍연은 말년에 신체 장애를 가지고, 재산을 다 탕진한 채 절집에 부쳐지내고 있었음. 이러한 존재는 어떻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인간학적 탐구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 인간의 운명에 대한 박지원의 통찰력과 깊은 눈을 잘 보여줌.

-세 번째 국면[편집 | 원본 편집]

<열하일기>는 연행록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 이전에도 다양한 연행록이 존재했는데, 그중에서도 홍대용의 <연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등이 주목됨. 박지원도 중국에 가기 전에 <노가재연행일기>는 읽은 것으로 보임. (<열하일기>에서 몇차례 언급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큰 자부심을 보였는데, 박제가, 이덕무 같은 자신의 추종자들 앞에서 <열하일기>를 읽기도 하였음. 당시 문인이 자신의 글을 벗이나 동인 앞에서 읽는 일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음. -> 박지원의 자부심을 알 수 있는 대목.

이덕무가 성대중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이런 말이 있음.

“<열하일기>의 (…) 전체 평점은 모두 본인이 한 것이고 제가 한 것은 이따금 있을 뿐입니다.”

‘본인’은 박지원을 가리킴. 즉,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스스로 평점을 붙였음을 알 수 있음. -> 박지원의 강한 자의식.

  •  평점: 전 근대시기 비평방식의 하나. 잘 썼다고 생각되는 글귀 옆에 동그라미를 치거나 평어를 붙이는 것. 흔히 청색이나 홍색의 먹으로 표기함. 보통은 남이 붙여줌.

이러한 예를 통해 박지원이 “<열하일기> 하나만 세상에 전해지면 족하다.“하고 한 말의 진실성을 알 수 있음. 박지원은 <열하일기>가 불후의 문학 작품을 남긴다는 마음으로 창작한 것으로, 이를 위해 책의 서술방식과 체제 등에 있어서 많은 노력을 가한 것으로 보임.

<열하일기>의 서술 전략[편집 | 원본 편집]

1.           완급의 적절한 조절과 안배: 우스갯소리와 진지한 말의 적절한 교차

: <열하일기>에는 소담이 많음, 그러나 진지한 담론도 매우 많음. 이 둘은 교묘하게 결합되어 나타나고 독자는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채 책에 빨려들어 갈 수 있음. 또한 진지한 담론과 소담이 교대로 나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내제되어 있기도 함. -> 긴장와 이완이 적절히 배합되는 글쓰기. 박지원의 평소 화법에서 유래한 글쓰기라 할 수 있음.

2.           의론, 서사, 묘사(특히 풍경 묘사)의 교차

: 의론을 하다가 갑자기 서사로 들어가거나, 서사를 하다가 돌연 의론을 전개하는 등 돌연성이 빈번하게 나타남. 역사를 회고하다가 현재 상황을 묘사하기도 함. ->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돌연한 문체의 변화와 그에 수반되는 어조, 시선의 변화는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고 매료시킴.

3.           각 편의 독립 서술과 일기체 서술이 결합됨.

:<도강록>, <혹정필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각 편이 독립적으로 서술되고, 내부는 일기체로 서술되기도 함. 다른 연행록에서는 보이지 않는 체제 -> 박지원의 새로운 창안이자 편집 기획.

따라서 <열하일기>는 부분적으로 의미를 가지면서도 전체적인 의미망을 획득하게 됨.

4.           작품 안의 작품

: <열하일기>가 그 전체로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지만, 그 내부에 독자적인 작품들을 곳곳에 박아둠.

Ex) <상기>, <호질>, <허생전>, <일야구도하기>, <야출고북구기> 등 -> 문예성이 아주 높고 고도의 미적 응축을 보여주는 작품들.

<열하일기>에서의 대청 인식, 대명의리론, 북벌론, 북학론의 문제[편집 | 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