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강 탈놀이와 민족의식
서두[편집 | 원본 편집]
탈놀이는 18세기에 대두하여 19세기에 성행함. 이 시기의 탈놀이는 종합 예술적 성격을 가지지만 대사가 있다는 점에서 문학으로서도 문제적임.
18-19세기의 탈놀이는 강렬한 민중 의식을 분출하고 있어 문학사적으로 주목됨. 민중의식은 사설시조, 야담, 판소리에서도 나타나지만 탈놀이의 민중 의식은 양반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장르와 다름. ->이는 탈놀이의 담당층이 천민 예인이었기 때문.(사설시조-여항의 가객을 중심으로 한 시정인, 야담-시정인+하층양반, 판소리-판소리 창자)
탈놀이는 이러한 담당층의 차이로 인해 우리 문학사에서 보기 힘든 반항적 파토스를 분출하고 있음. 판소리에도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저항이 있지만, 탈놀이는 양반을 전면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강도와 거침이 다름.
연구자에 따라서는 ‘탈놀이’ 대신 ‘탈춤’, ‘가면극’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함. 그러나 탈춤은 ‘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종합예술인 탈놀이의 성격을 살리지 못하고, 가면극은 탈놀이에서 중요한 춤이 부각 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어 탈놀이라는 명칭이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알맞아보임.
전래되는 탈놀이 중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동래야류>, <수영야류>에는 ‘놀이‘(류가 놀이라는 뜻)라는 말이 보임. -> 놀이는 춤, 연기, 대사, 노래, 음악을 모두 포괄하는 것. 전승적 맥락, 우리 고유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도 탈놀이라는 명칭이 알맞음.
탈놀이란[편집 | 원본 편집]
탈놀이: 탈을 쓰고 하는 놀이. 탈놀이는 신라, 고려, 조선 전반에도 계속 존재하던 것이었음.
Ex) 최치원의 <향악잡영> 중 대면, 속독 (탈을 쓰고 추는 춤), 고려~조선까지 존재하던 <처용무>, 산대희의 연회 중 탈놀이 등
->이러한 탈놀이는 탈을 쓴 채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는 점, 왕실이나 국가기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 또한 <처용무>를 제외하면 1인무나 2인무였고, 4인무를 넘는 것은 없던 것으로 보임. 대사도 없었음. (<처용무>는 춤+노래가 있었음)
그러나 18세기 등장한 탈놀이는 이전의 탈놀이와는 달라짐.
1. 연희 주관자의 변화
: 이전- 왕실이나 국가기관의 요구 (왕실의 연락, 의식 등을 위해)
18세기 이후- 서울 시정에서 광대패가 흥행을 위해 (상업적 동기)
-> 상업적 동기로 인해 탈놀이의 성격, 내용, 형식이 바뀌게 됨.
2. 연희 관람자의 변화
: 이전 – 국왕, 공경대부, 중국 사신 등
18세기 이후 – 시정의 민중
춤이 역동적이거나 선정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대사가 새롭게 만들어짐. 새로운 인물의 탈도 여럿 생겨남. => 이러한 변화에 따라 양반층에 대한 공격적 풍자와 조롱이 탈놀이게 등장하게 됨. (이전의 문학사에는 없던 것.)
두 계통의 탈놀이[편집 | 원본 편집]
1. ‘본산대놀이’: 18세기 서울 시정에서 성립된 새로운 탈놀이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봉산탈춤>을 비롯한 해서탈춤, <수영야류>등의 야류, <통영오광대>등의 오광대 탈놀이는 ‘본산대놀이’의 영향 하에서 성립됨. 즉, 본산대놀이 계통의 탈놀이
2. 서낭제 탈놀이: ‘본산대놀이’ 이전에 성립된 다른 계통의 탈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 연희 주체: 하층농민, <강릉관노탈놀이>- 연희 주체: 관아의 노비. 등.
성립시기는 알 수 없음. 그러나 본산대놀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
상업과 연관을 맺는 본산대놀이와 달리 마을굿이라는 공동체적 제의와 연관을 맺고 있음. -> 따라서 두 탈놀이의 성격과 지향이 달라짐.
그러나 서낭제 탈놀이류인 <하회별신굿탈놀이>도 본산대놀이처럼 파계승 과장과 양반 과장이 존재함. (과장: 판소리의 ‘마당‘, 현대극의 ’막‘과 같은 개념) 하지만 본산대놀이의 과장에 비해 극적 갈등이 빈약하고, 양반에 대한 조롱이 심각하지 않음.
=>그러므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파계승 과장과 양반과장이 <본산대놀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듦. 반대로 본산대놀이의 파계승, 양반과장 형성 과정에 서낭굿 계통의 탈놀이가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임. 하지만 본산대놀이가 전적으로 서낭제 탈놀이의 영향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고, 여러 형성요인 중 하나로 보아야 함.
<남성관희자> - 본산대놀이의 특징적 변모[편집 | 원본 편집]
본산대놀이는 서울의 애오개, 구파발, 사직골, 노량진, 만리재 등에서 연희되었다고 전해짐. 현전하지는 않음. <양주별산대놀이> 등의 본산대놀이 계통의 탈놀이는 20세기 전기, 중기에 대사 채록이 이루어졌지만, 본산대놀이는 채록되지 않음.
그러나 <애오개본산대놀이> 혹은 <사직골본산대놀이>를 배웠다는 <송파산대놀이>(별산대놀이에 속함.)를 통해 본산대놀이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음.
- 본산대놀이, 별산대놀이: ‘본本산대놀이‘, 별别산대놀이’. 별산대놀이와 분류하기 위해 연구자들이 붙인 이름. 조선시대에는 그냥 ‘산대놀이’로 불리었음.
강이천이라는 문인이 정조 3년 본산대놀이를 구경하고 지은 <남성관희자>라는 시를 통해 18세기 본산대놀이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음. ‘남성’은 남대문, ‘관희자’는 연희를 관람하다라는 뜻.
11살 때 남대문 밖에서 연행된 인형극과 탈놀이를 구경하고, 11년 뒤인 1789년 이 시를 지었음. 이를 통해 본산대놀이에 상좌춤 과장, 노장 과장, 샌님.말뚝이.포도부장 과장(양반 과장), 거사.사당 과장, 할미 과장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노장 스님 어디서 오셨는지 (…) / 사미승 그 뒤를 따르며 연신 합장하고 배례하네 / (…) 한 젊은 여인 등장하자 몹시 좋아하며 / 노흥을 스스로 금치 못해 파계하고 청혼을 하네(…) / 술에 몹시 취한 웬 중이 소리치며 주정을 부리네.“
노장(늙은 승려) 과장의 한 대목. 시의 젊은 여인은 ‘소무’를 가리키고, 술이 몹시 취한 중은 ‘취발이’를 가리킴.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의 노장 과장에는 소무가 두 명 등장하고, 취발이가 노장과 대결해 소무 하나를 빼앗아 차지함. 그러나 <봉산탈춤>에는 소무가 한 명만 등장하고 노장이 취발이와의 싸움에서 패배해 취발이가 소무를 차지하게 됨. -> <봉산탈춤>이 본산대놀이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
“추레한 늙은 유생이 이 속에 함부로 들어온 것은 잘못 / 입술은 언청이요 눈썹은 기다랗고 길게 뽑은 목은 멀떠구니 같네. / (…) 헌걸찬 한 무부 장사로 뽑힘 직한데 / 짧은 창옷에 신수 훤하고 호기로우니 누가 감히 거스르리 / 유생이고 노장이고 꾸짖어 물리치길 / 마치 어린애 다루듯 하네. / 젊은 여인을 홀로 차지해 끌어안고 사랑하는데 / 칼춤은 어찌 그리 기이한지 몸이 날래기는 도망치는 토끼 같네.“
샌님.말뚝이.포도부장 과장(양반 과장)의 묘사 장면.
멀떠도니는 새의 모이주머니. 유생의 목이 밥통처럼 늘어져 있음을 묘사한 것. -> 유생을 장애인으로 표상되고 있음. 현전하는 본산대놀이 계통의 탈놀이도 양반은 장애인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시선이 18세기 본산대놀이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유생’은 샌님(생원님)을 가리킴.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봉산탈춤> 등에 수염과 눈썹이 허옇고 언청이인 샌님탈이 나옴. 이 시에 묘사된 샌님과 일치.
‘무부’는 신체 강건하고 용맹스러운 사내를 뜻하는 말로,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에 ‘포도부장’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포도부장을 가리킨다고 여겨짐. 샌님.말뚝이.포도부장 과장에서 포도부장은 샌님의 첩인 소무를 빼앗은 뒤 칼춤을 춤. 현전하는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에는 칼춤 장면이 없지만 원래 본산대놀이에는 칼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이 시를 통해 본산대놀이에서 포도부장이 샌님의 대립자로 상당히 미화되어 있음을 확인가능함. 본산대놀이에서 포도부장이 미화되고 있는 것은 당시 서울 시정의 유흥문화를 주도하고 있던 ‘왈짜’집단과 친연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임.
: 본산대놀이에 등장하는 ‘포도부장’은 실질상 포도군관이나 포교에 가까움. 이들은 왈짜의 일원이었음. 또 <남성관희자>의 서두에 탈놀이를 구경하는 ‘액정서 하예’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왈짜에 속함. 즉, 왈짜가 본산대놀이 향유층의 일부였고, 유력한 후원자였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 더 나아가 광대패 일부는 스스로 왈짜에 속하기도 했을 것. -> 따라서 왈짜 집단을 고려하여 포도부장을 미화한 것으로 보임. 이러한 향유층 특징 때문에 본산대놀이에는 왈짜적 인간관과 세계관, 감수성과 취향이 짙게 나타남.
또한 시에서 포도부장이 등장하기 전 샌님이 꾸짖고 있던 것은 말뚝이로 여겨지는데, 강이천은 말뚝이와 샌님의 대결과정은 제대로 서술하지 않고 간단히 처리한 것으로 보임. (이전의 노장 과장에서도 취발이가 노장에게서 소무를 빼앗는 장면은 회피함.)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샌님과 말뚝이가 한참동안 말을 주고 받다가 그 끝에 포도부장이 등장하고 , <송파산대놀이>에서는 샌님.말뚝이 과장에 이어 바로 샌님.포도부장 과장이 나옴. 이는 본래 본산대놀이에서 ‘샌님-말뚝이-포도부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과장이 있었고, 이것이 두개의 과장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임.
이전에는 강이찬의 시에 근거하여 말뚝이의 존재가 미미하다가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에서 부각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음. 그러나 말뚝이는 시에서 강이찬이 부각하지 않은 것일뿐, 실제로는 본산대놀이에서 가장 문제적이며 유력한 인물이었을 것. —> 현전하는 본산대놀이 계통 탈놀이에서는 샌님과 말뚝이의 대결을 모두 찾아볼 수 있고, 이 과장(양반과장)은 탈놀이에서 가장 정채있고 흥미로운 부분.
“할미 성깔도 대단하지 / 머리 부서져라 시기 질투하여 / 티격태격 싸움질 잠깐새 / 숨이 막혀 영영 죽고 말았네. / 무당이 방울 흔들며 굿을 하는데 / 그 소리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
할미 과장에 대한 묘사. ‘시기질투’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과장에 첩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음. -> 할미가 영감이 데려온 첩과 싸우다 갑자기 죽자 무당을 불러와 진혼굿을 벌이는 내용.
이 과장은 내용의 변이는 있으나 본산대놀이 계통의 탈놀이에 모두 등장함.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에는 첩이 등장하지 않고, <봉산탈춤>, <동래야류>, <통영오광대> 등에는 첩이 등장함. <김해오광대>, <가산오광대>에는 할미가 아니라 영감이 죽는 경우도 있음.
강이천의 시를 통해 본산대놀이가 몇 개의 독립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노장 과장, 양반 과장, 할미 과장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그리고 이러한 면모는 별산대놀이, 해서탈춤, 야류, 오광대와 같은 본산대놀이 계통의 탈놀이에서도 똑같이 확인됨.
도시 탈놀이의 발생과 성행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본산대놀이와 그 계통의 탈놀이는 모두 도시 탈놀이라고 할 수 있음. 본산대놀이는 대체로 18세기 중엽 전후에 성립되었고, 별산대놀이는 19세기 초중엽에 성립된 것으로 보임. <봉산탈춤> 등의 해서탈춤, <동래야류>등의 야류, <통영오광대> 등의 오광대는 정확한 발생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세기에 성립되었을 것.
본산대놀이의 명칭에 존재하는 ‘산대’는 연회하기 위하여 목재로 산 모양으로 만든 대를 말함. ‘오산’이라고도 함. (오산: 신선이 사는 산. 봉래산)
산대는 봉래산처럼 꾸몄고, 여러 잡상과 인물상이 설치되었음. 산대 아래에서 가무잡희를 벌였는데 이를 산대희라고 함. 산대희에는 땅재주, 솟대타기, 무동, 접시돌리기, 불 토해내기 등 다양한 놀이가 있었고 인형극과 탈춤도 포함되어 있었음. 산대희는 나례희(잡귀를 쫓는 의식. <처용무>, 방울 받기, 줄타기, 솟대 타기등이 연행됨.)와 연결되어 ‘산대나례’로 불렸음. 조선에는 나례도감이라는 기구를 두고 ‘산대나례’를 관장하였음.
중국에서 산대는 중국 한나라 때 처음 제작되었으며 청나라 때까지 전통이 이어졌음. 우리나라에서 산대라는 명칭이 쓰인 것은 고려때부터. ‘산대색‘이라는 산대 일을 관장하는 관서가 있었음. 조선 시대에는 중국 사신이 올 때 ’산대도감‘이라는 기구를 임시로 두어 산대의 제작과 놀이를 준비하게 함.
산대도감은 의금부와 군기시가 분담해서 관장함. 광해군 때의 기사를 보면 의금부가 전란 후 나라 형편이 어려우니 산대를 실행하지 말자고 함. -> 산대희를 벌이는 것에 국가의 재정 지출이 많았음을 알 수 있음. 이후 인조는 나례도감을 혁파하고 중국 사신이 올 때만 작은 규모로 설치하도록 함. 인조 이후로 국가적 행사로서의 나례희는 쇠퇴하였고, 영.정조 때는 폐지됨.
조선 때는 왕실이나 국가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서울에 일정한 수의 창우를 거주시킴. 창우는 천민신분이었고 서울에 거주하는 창우는 경중우인이라고 부름. 도성에서 산대희를 벌일 때면 경중우인으로는 부족하여 외방재인(지방에 거주하는 창우)를 불러야 했음. 산대희가 끝나면 외방재인은 다시 지방으로 돌아감.
=>즉, 산대는 원래 왕실과 국가의 필요에 따라 설치된 공연 무대였음. 그러나 산대나례의 침체 이후 경중우인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음. 경중우인을 구성하는 집단 중 하나인 반인(泮人: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들이 본산대놀이를 창조함.
구파발(녹번리)는 나례도감에 예속되었던 우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인데, 18세기 영조 때 산대희가 폐지되자 서울의 하층 주민을 대상으로 새로운 놀이를 창조한 것으로 보임. (최초로 본산대놀이가 연회된 곳이 구파발로 추정됨.) <구파발본산대놀이>. 이후 구파발의 일부 우인들이 애오개로 옮겨갔고, <애오개본산대놀이>가 연행됨. 본산대놀이는 서울의 이곳저곳으로 확산되어 <노량진본산대놀이>, <사직골본산대놀이>, <만리재본산대놀이>가 생겨남. (강이찬이 1779년 구경한 것은 <만리재본산대놀이>였을 것으로 추정됨)
본산대놀이가 성행하며 서울 밖 양주와 송파에 별산대놀이가 생김.
황해도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봉산탈춤>, <강령탈춤>과 같은 해서탈춤을 성행시킴. 해서탈춤은 20세기 초까지 봉산, 서흥, 은율, 해주, 강령 등 각지에 전승됨.
경남 지방에서는 야류와 오광대를 성립시키기도 함. 야류(들놀이)는 동래, 수영, 부산진 등에 전래되었고 오광대(다섯 광대 놀이)는 서부경남에 전승됨. 야류와 오광대에는 본산대 놀이에 없는 과장이 있고, 본산대놀이에 있는 과장도 변이가 많은 것으로 보아 19세기 중후반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임.
본산대놀이는 상업이 발달한 곳에서 연행되었음. 가장 유명한 <애오개본산대놀이>가 연행된 애오개 주변에는 당시 서울 3대 시장 중 하나인 칠패가 있었음. 본산대놀이 계통의 탈놀이들도 역시 장시가 번성하고 상업이 발달한 곳에서 연행됨.
=>이를 통해 본산대놀이가 18세기 서울의 상업적 번성을 배경으로 성립되었고 계통의 탈놀이 역시 상업을 배경으로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박제가의 <성시전도>에는 “홀연 천천히 큰 길을 지나면 (…) 사고팔기 끝나 연희 벌이기를 청하니 / 창우의 복장 놀랍고도 괴이하네.” 라는 구절이 있음. 한양의 시장 풍경을 묘사한 것인데, 장이 파하자 연희를 벌였다는 것이 주목됨.
탈놀이가 공연되면 시장에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어 상인들이 연희를 지원하였음.
본산대놀이는 18세기 산대나례희의 폐지로 인해 경중우인(반인)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과정에서 성립되었고, 서울 시정 상업의 발달이 이를 뒷받침하였음.
도시 탈놀이가 나례희.산대희에서 물려받은 것들[편집 | 원본 편집]
18-19세기의 도시 탈놀이는 민간에서 흥행을 위해 공연되었기 때문에 나례희.산대희(왕실적. 국가적 공연)와는 본질적 차이가 있음.
나례희, 산대희 | 도시 탈놀이 | |
본질적 차이 | 왕실적, 국가적 공연 | 민간에서 흥행을 위해 공연됨. |
향유층 | 지배층.
(지배층의 구미에 맞는 내용으로 창작됨.) |
피지배층
(하층민의 구미에 맞는 내용으로 창작됨) |
양반 | 양반을 ‘대상화’하는 놀이가 없음. | 양반을 대상화하는 놀이가 있음. -> 양반을 극도로 희화화하고 조롱(머저리와 장애인으로 표상됨) |
대사 | 대사가 없음. (탈춤에 노래가 동반되기는 함) | 양반을 놀리고 능욕하기 위해 긴 대사를 창조해냄.(민중의 말) |
나례희, 산대희와 도시 탈놀이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몇몇 요소를 가져오기도 함.
본산대놀이에는 산대희와 다르게 산대를 설치하지 않지만, 산대라는 말을 넣은 것은 연희주체가 동일하고, 산대희의 몇몇 요소가 계승되고 있기 때문.
“신라의 처용은 칠보를 몸에 걸치고 / 꽃가지 머리에 꽂아 향기로운 이슬이 떨어지네. / 이리저리 오가며 긴소매로 태평무를 추는데 / 취한 뺨 발그레해 아직 술이 덜 깬듯.”
고려 말 이색의 <구나행>, 나례를 보고 읊은 시. <처용무>는 긴 소매를 너울거리며 추는 춤인데, 이 ‘긴 소매’가 본산대놀이를 비롯한 도시 탈놀이에 계승되고 있음.
나례는 역신, 잡귀 <-> 퇴치차의 대립 구조로 짜여 있고, 퇴치자인 십이지신이나 처용이 춤을 추며 역귀나 잡귀를 쫒아냄. 도시 탈놀이는 이러한 대립구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여 원용하고 있음. (탈놀이: 취발이 <-> 노장, 말뚝이 <-> 양반의 대립, 나례: 역신 <-> 퇴치자. 구조의 상동성)
<양주별산대놀이>의 연잎.눈끔쩍이 과정과 <봉산탈춤>, <양주별산대놀이>의 팔먹중 과장에서 나타나는 물리침의 형식이 나례의 벽사 형식과 동일함. (연잎은 천살성이고 눈끔쩍이는 지살성. 이들의 눈살을 맞으면 누구든 죽어서 부채로 눈을 가리고 등장함. 이들이 상좌, 옴중, 먹중을 차례로 물리침.)
나례에 있는 사자탈춤이 도시 탈놀이에 나타나기도 함. 그러나 나례의 벽사의식은 약화되고 오락성이 강화됨.
=>도시 탈놀이는 나례의 이원적 대립구조, 물리침의 형식, 벽사 의식을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오락적 텍스트를 창조하고 있음.
반인, 그 멘탈리티[편집 | 원본 편집]
18, 19세기 탈놀이 연희자는 ‘광대’로 불렸음. 이학규의 <동사일지> 광대 항목 중 “우리말로, 가면을 쓰고 연희를 하는 자를 광대라고 한다.”는 말에서 확인 가능.
본산대놀이를 연행한 광대는 ‘반인’이었는데, 우리말로는 ‘편놈’이라고 불렀음. 이 명칭에는 광대를 얕잡아보는 양반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음.
이 편인들은 18, 19세기 한국문학사에서 대단히 문제적인 ‘하나의 하위 주체’라고 할 수 있음. 탈놀이를 통해 금기를 넘어서는 성에 대한 상상력, 사회적 규범과 강상을 벗어난 양반층에 대한 능멸, 욕설과 비속어의 거리낌 없는 구사 등을 구현하며 새로운 미학을 창조해냄. -> 반인이 이러한 텍스트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반인의 멘탈리티에서 비롯됨.
반인은 원래 성균관의 노비로, 성균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거나 문묘의 수직을 하거나, 문묘 제향때 소용되는 희생을 잡는 일 등을 함. 도살에 종사했기 때문에 서울에 현방이라는 푸줏간을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허용되었음.
반인의 유래는 고려 말 안향이 개성의 성균관 문묘에 자신의 노비 백여 명을 헌납하였고, 조선으로 개창된 뒤 한양의 성균관으로 그대로 옮겨온 것. 그 자손이 수천 명으로 늘어 성균관 주변에 반촌이라는 마을을 이루고 살게됨.
“반인들은 소년이 되면 굳센 자는 노름을 일삼거나 유협이 되고, 쪼잔한 자는 말리를 좇는다.“
18세기 서명응이 쓴 <안광수전>의 구절. ‘유협’은 협객, ‘말리를 좇는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이름. -> 반인의 일부가 노름을 일삼거나 유협이 되었음. 유협은 왈짜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
“반인들은 기개를 숭상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왕왕 싸우다가 칼로 가슴을 긋거나 다리를 찌르기도 한다.”
<반중잡영> 제 218수, 이 시에서 반인들 중에 호협한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음. 이 시에서 나타나는 반인들의 기질이나 행위 양상은 왈짜패와 비슷함.
“가면극 역자를 편놈이라고 따로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타 계습에서 호칭하는 것이며, 무동.땅재주꾼과 격은 동격이지마는 경성에 재주하는 고로 한층 고위에 있었다 한다. 그리고 이들은 포도군사에게 예속되어 있어 그 실제적 세력이 그 지위를 얼마간 보장한 경향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국악인인 하규일과의 대담. 본산대놀이의 반인출신 광대가 포도청에 예속되어 있었음을 증언하는 말.
반인 중 일부가 광대 노릇을 한 것이지만 탈놀이를 논 광대들은 반인의 체질과 행위 양태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함. 왈짜적 정체성은 성애에 대한 탐닉, 음주가무 등 유흥을 즐기는 태도, 돈으로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려는 성향, 육체의 힘 뽐내기, 윤리나 규범의 무시 등임. -> 이러한 태도나 성향은 기존의 지배적 사회 질서에 대한 반항으로 연결됨. (본산대놀이의 양반 과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요소)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은 위력에 대한 과신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1. 여성을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다는 점, 2. 장애를 가진 몸에 대한 폭력적 시선이라는 두 가지 약점을 안고 있음. -> 즉, 왈짜적 정체성은 이 두 존재를 ‘타자화’함으로써 정립될 수 있었던 것.
탈놀이의 과장들[편집 | 원본 편집]
강이천의 시 <남성관희자>를 통해 본산대놀이에 상좌춤 과장, 노장 과장, 샌님.말뚝이.포도부장 과장(양반 과장), 거사.사당 과장, 할미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이 과장들은 유기적 관계가 아니고, 각각 독립적. (본산대놀이 계통의 탈놀이들도 동일)
본산대놀이와 계통의 탈놀이들의 과장에는 다른 점도 있지만, 노장, 양반, 할미 과장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
(과장 내용들 318~329)
탈놀이의 언어 및 상호텍스트성[편집 | 원본 편집]
언어[편집 | 원본 편집]
도시 탈놀이에서 구사되는 언어는 비속함이 가장 큰 특징. 비속어는 판소리나 사설시조에서도 발견되지만, 도시 탈놀이의 비속어는 욕설, 육담이 구사된다는 점에서 질이 다름.
도시 탈놀이에는 난잡한 성행위 장면이나 이러한 행위를 뜻하는 표현이 많음. 그래서 비속어 중에서도 성적 비속어가 주목됨. 특이한 점은 겁탈, 근친상간, 남색과 관련된 것이 많으며, 이는 모두 남성 화자가 하는 말임. —> 탈놀이의 욕설과 성적 비속어가 억압과 권위주의로부터의 탈출, 성의 개방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존재함.
탈놀이는 사회의 가장 하층 존재로부터 창조된 하위 문화이기 때문에 사회적, 도덕적, 문화적 억압에 대한 반항이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욕설과 성적 비속어는 이러한 현상의 언어적 표출. 그러나 겁탈, 남색과 같은 성폭력을 성의 해방, 권위주의의 탈출로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음. 탈놀이에 나타나는 여성, 남성에 대한 강간에는 성에 대한 왜곡된 의식이 나타나고, 성적 비속어는 이러한 왜곡된 의식의 언어적 반영으로 보아야 할 것.
탈놀이 언어의 또 다른 특징은 사투리의 구사. 본산대놀이가 지방으로 확산되며 지방의 탈놀이에는 사투리가 쓰이게 되었음. -> 지방어의 문학어로의 편입. 한국문학의 언어적 지반을 확대하며 다양성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음.
상호텍스트성[편집 | 원본 편집]
상호텍스트성: 한 텍스트 속에 다른 텍스트들이 들어와 의미를 생성하는 것.
도시 탈놀이 안에는 조선 후기에 유통된 다양한 문학 장르에 속한 작품이 들어와 있음. 주로 우리말이나 국문에 기반한 장르. (국문소설, 판소리, 판소리 단가, 시조, 사설시조, 12가사, 잡가, 민요 등)
별산대놀이에는 상호 텍스트성이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에 비해 해서탈춤, 야류.오광대에서는 상호텍스트성이 도처에 나타남. 특히 <봉산탈춤>에는 12가사, 판소리 단가, 판소리, 국문소설 등이 여기저기 나타남. (Ex) 미얄할미가 헤어진 영감을 찾으며 부르는 노래가 -<춘향가> 보고지고 타령.)
국문소설 중에는 <구운몽>이 가장 많이 소환됨. 별산대놀이를 제외한 탈놀이에 모두 <구운몽>의 육관대사, 팔선녀 등이 거명됨.
또한 민요도 들어와 있는데, <강령탈춤>이 그 점을 잘 보여줌. (ex) <몽금포타령>, <대꼬타령> 등이 삽입됨. -> <강령탈춤>의 향토색을 드러내는 것에 기여함.)
탈놀이에 판소리 사설이 들어올 경우에는 한문 어투가 크게 강화됨. 이는 탈놀이 광대의 재담과 관련이 있어보임. 탈놀이 광대들은 상층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문제가 없었음.
->별산대놀이에는 판소리 사설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아 본산대놀이에는 판소리 사설이 없었고, 별산대놀이 이후에 성립된 해서탈춤, 야류, 오광대에 들어서서 판소리 사설이 첨가되었을 것으로 보임. 즉, 원래 하층 민중어에 기반해 성립된 도시 탈놀이에 상층의 언어가 섞이게 된 것. 탈놀이의 언어적 개방성. (그러나 탈놀이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긍정적인 부분은 아님.)
탈놀이의 민중 의식과 그 한계[편집 | 원본 편집]
탈놀이에서는 양반이 극도로 조롱되며 권위가 해체됨.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 나타나는 현상.
이러한 양반에 대한 조롱과 능멸에는 신분제 부정의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음. -> 이 점에서 탈놀이는 민중 의식의 성장을 보여주는 부분.
사설시조, 판소리, 야담에서도 민중 의식의 성장을 볼 수 있지만, 이들과 달리 탈놀이는 ‘양반과의 적대적 대결을 통해‘ 신분제 부정을 지향하고, 그것을 핵심 의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가장 급진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음.
탈놀이는 또한 성적 욕망의 적극적 긍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됨. 조선 사회는 주자학을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성적 욕망은 억압되거나 은폐되곤 했음. (특히 지배층의 문화에서.) 그러나 탈놀이는 성적 욕망에 제한이나 억압이 없음. -> 이는 하층 천민이나 시정의 왈짜, 유랑의 예인과 같은 부류의 민중 집단이 지닌 의식. 이들의 의식이 광대를 매개로 하여 표출된 것. 이런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짐.
(판소리, 야담, 사설시조에도 성적 욕망에 대한 긍정이 드러나나 사회적 규범, 도덕을 부정하며 나타나지는 않음. 탈놀이는 규범, 도덕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름.)
또한 건장한 육체에 대한 긍정이 두드러지기도 함. 탈놀이는 정신적 가치보다는 육체성의 추구에 기반을 두고 있음. (성적 욕망의 긍정과도 연결되는 부분). -> 양반 문화가 정신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탈놀이의 육체성에 대한 긍정은 기존의 권위나 규범에 대한 파괴를 낳게 됨.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 삶의 실존에 차이가 있고, 이 차이가 정신성/육체성 긍정의 차이를 불러냄. -> 이 점에서 살펴본다면 탈놀이의 육체성 강조는 민중 의식의 표출로 해석할 수도 있음.)
탈놀이에는 몇 가지 민중 의식의 성취가 확인되나, 이러한 민중의식의 성취는 동시에 민중의식의 한계와도 연결되게 됨.
1. 양반에 대한 풍자와 능멸
: 신분제 부정의 지향을 가짐. 그러나 ‘인간 해방‘의 메세지를 담지는 못함.
ex) 양반 과장의 말뚝이: 양반을 조롱하며 양반의 권위를 부정하지만 인간의 평등에 대한 호소로는 나가지 못함. -> 즉, 양반에 대한 공격과 적대감에 그칠 뿐 평등에 대한 의식은 결여됨.
또한 풍자나 능욕을 통한 ‘부정‘의식은 있으나 ’비판‘의식이 없다는 점도 한계. 비판을 통해 타자의 본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담보할 수 있게 됨. 하지만 말뚝이는 비판의식을 보여주지는 못함.
말뚝이의 한계는 곧 탈놀이 연희의 한계라 할 수 있음.
2. 성적 욕망과 건장한 육체성의 적극적 긍정
: 기존의 문화와 규범에 반항하며 이를 허물고자 하는 지향은 긍정적이나,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적 성향은 비판적으로 보아야 함.
이러한 폭력적 성향은 가부장제의 내면화와 무관하지 않음. 말뚝이, 취발이, 영감 등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성적 폭력성은 당대 하층, 중간층 남성들이 내재하고 있는 가부장제 폭력성의 성적 발현으로 보아야 함. 그러나 보편적인 것은 아니고 왈짜 집단의 성 의식이 광대에게 전유된 것으로 보아야 함. -> 이는 민중 의식의 특수한 면모를 보여준다 할 수 있음.
=>민중 의식에는 긍정적 계기 뿐만 아니라 부정적 계기도 공존하고 있으며, 민중도 단일하지 않고 다면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함.
탈놀이에서 여성은 지배와 소유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나타남. (타자로 등장) 대조적으로 사설시조나 판소리, 야담 장르에서 여성은 종종 주체로서의 면모를 보여줌. -> 이는 장르 담당층의 사회적.계급적 여건에서 기인하는 차이.
또한 장애인에 대한 타자화 역시 발견됨. 탈놀이에서 양반은 병신으로 표상되고 있는데, 이는 양반의 무능력함, 부도덕함을 풍자.조롱하기 위해서. <-> 민중을 대변하는 말뚝이는 건장하고 힘이 넘치는 신체를 통해 양반에 대한 우위를 확보함. ->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는 ‘병신‘에 대한 조롱과 타자화 역시 나타나는 것. 건강한 몸에 대한 긍정은 불편한 몸에 대한 경멸을 담보로 하는 것.
=>탈놀이의 여성, 장애인에 대한 타자화를 통해 탈놀이에 담긴 민중의식의 내적 모순과한계를 확인할 수 있음. 또한 이를 통해 민중 의식은 마초적 민중 의식으로 규정할 수 있음.
마무리[편집 | 원본 편집]
18세기 중반을 전후해 성립된 본산대놀이와 그 영향을 받은 별산대놀이, 해서탈춤, 야류, 오광대는 조선 후기 민중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음.
탈놀이의 민중 의식은 사설시조, 판소리, 야담이 보여주는 민중 의식과 통하기도 하고, 차별을 가지기도 함. -> 이는 민중의식의 다양한 위상과 층위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 민중의식은 단일하지 X
질문과 답변[편집 | 원본 편집]
-탈놀이가 탈을 쓰고 놀이를 하는 이유[편집 | 원본 편집]
: 동아시에서 탈은 원래 역신이나 귀신의 퇴치를 위한 주술적 목적으로 쓴 것으로 보임.
(ex) 중국 ‘장상시‘의 탈: 큰 탈을 쓰고 역귀를 퇴치하는 일을 함.
최치원의 <향악잡영> 1편 대면: 황금빛 가면을 쓴 사람이 (…) 귀신을 부린다.
사람들은 탈에 주술적인 벽사의 권능이 있다고 믿었고, 탈은 의식, 의례와 관련을 가지게 됨.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말 탈은 유희의 측면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이 변화는 더욱 심해짐. -> 탈이 의례와 오락 두가지의 용도가 됨.
18세기 본산대놀이는 탈이 가지고 있던 두 가지 기능을 계승하고 있어 벽사적, 오락적 요소가 모두 나타남. 그러나 오락적 요소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할 수 있음.
나례희.산대희의 탈춤과 달리 도시 탈놀이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등장인물마다 탈이 다름. (탈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나타내므로, 탈을 통해 인물의 정형화가 이루어짐.) -> 탈이 역할의 의미를 가지게 됨. 탈마다 정형화된 역할이 부여되기 때문에 극적 갈등의 연출이 쉬워짐.
탈은 이러한 장점도 있지만, 인물의 내면 표현을 차단한다는 문제점이 있기도 함. -> 이점에서 탈놀이의 연극적 발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음.
본산대놀이가 서울에서 사라진 이유[편집 | 원본 편집]
: 본산대놀이는 1900년대까지도 연희되었고, 1910년대에도 변화에 적응하려 하였으나, 결국 소멸된 것으로 보임.
본산대놀이가 서울에서 소멸된 것에는 내적요인과 외적요인이 있음.
1. 내적요인
: 탈놀이의 탈은 정형화 되어 있어 새로운 대본을 만들기 힘듦.
또한 탈놀이의 언어는 거칠기 때문에 근대 시민 계급의 환영을 받기 어려웠음.
2. 외적요인
: 19세기 말 개화기에 이르러 자본주의 문명이 형성되며 공연 문화도 바뀌게 됨. 노천의 가설 연희장에서 하던 공연이 옥내 극장 공연으로 바뀌었고, 탈놀이는 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웠음. (재담, 판소리, 민요는 닫힌 구조에서도 공연이 가능하지만, 탈놀이는 열린 구조가 아니면 공연하기 어렵기 때문.)
ð 서울은 근대화의 속도가 빨라 적응하지 못한 본산대놀이가 소멸된 것으로 보이고, 지방은 근대화의 속도가 느려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음. 그 결과 1930년대 이래 대본들이 채록될 수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