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무신란 이후의 문학과 신진사류의 의식 지향
무신란과 문학장의 변화[편집 | 원본 편집]
고려전기; 문벌 귀족 사회로, 문벌귀족들에 의해 한문학이 주도됨.
인주 이씨(이자겸), 해주 최씨(최충), 경주 김씨(김부식) 등의 문벌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문벌의 인물들이 과거를 통해 입신하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문학 담당층이 되었음.
1170년(고려 의종)에 일어난 무신란을 분기점으로 고려 후기가 시작됨. 정중부는 반란을 일으켜 백여 명의 문신을 살해하고 정권을 차지함. 이 당시 개경의 문신이 5백여 명쯤 됐는데, 1/5을 살해한 것. 살아남은 문신 중 상당수는 무신에게 포섭되었음.
수많은 문신이 살해되며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지방의 유생들이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을 신진사류라고 부름.
정중부는 무신란을 일으키며 문관(문신의 모자)를 쓴 자는 서리라도 죽이고 씨를 남기지 말라는 명을 내렸음. 이로 인해 사망한 문신도 있지만, 화를 피해 절 같은 곳에 숨어 지낸 문인도 있었음.
무신란 이후 문학장은 크게 바뀌게 되고, 세 부류의 문인이 관찰됨.
- 죽림고회의 문인
: 대부분 문벌 자제. 개경을 근거지로 함.
2. 김극기류의 문인
3. 무신정권에 적극 참여한 문인
: 2, 3번 부류는 주로 지방 향리 출신이거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신진사류에 해당함.
-> 이들은 체질이나 의식 지향(멘탈리티)에서 차이를 가짐.
죽림고회의 일곱 문인[편집 | 원본 편집]
죽림고회는 죽림의 고상한 모임이라는 뜻. 무신 정권 때의 이인로, 임춘,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일곱 문인이 늘 서로 만나 술 마시고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을 이르는 말. 이들은 중국의 ‘죽림칠현’, ‘강좌칠현’에 견주어 해좌칠현이라고 불렸음. (해좌는 바다 왼쪽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킴)
- 죽림칠현: 중국 위진시대에 죽림에 은거하여 청담을 일삼은 일곱 명의 은자.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晉) 초에 노장(老莊)의 사상을 숭배하여 속세를 떠나 죽림에서 혜강(嵇康)과 함께 놀던 완적(阮籍),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을 말한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멀리하고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도피하여 술 마시고 시 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도덕과 관습을 벗어나 노장 사상을 숭배하고 무위자연을 노래하였다. 이들 중 혜강은 귀공자 종회(鍾會)가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을 때 예를 갖추지 않아, 뒤에 종회의 참소를 받아 사형을 당하였다. 완적은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으며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원한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이들 해좌칠현은 무신정권에서 득의하지 못했던 사인(士人)이나 벼슬을 못한 소외된 사인들에 해당함. 그래서 이들은 무리를 이루어 술과 시로 즐기며 지내면서도 자부심과 세상에 대한 불만이 높았기 때문에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였음. -> 이들은 자신이 불우하다는 의식이 몹시 강했음.
우리 문학사에서 불우하고 소외된 문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문학 활동을 한 것은 죽림고회가 처음. (조선 후기에는 취향이나 지체가 비슷한 사람이 모여 시회를 갖는 일이 빈번해짐. 죽림고회는 이런 일의 원류라 할 수 있음.)
이인로는 증조부가 평상사를 지낸 귀족 집안 출신. 무신란 때 산으로 피신해 승려 행세를 하다가 세상이 잠잠해진 뒤 속세로 돌아와 명종 때 장원급제를 하고 고종 초에 우간의대부에 올랐음. 정4품 벼슬로, 당세에는 크게 쓰이지 못했으나 죽림고회의 구성원 중에 가장 높은 벼슬을 지냈음.
이인로는 임춘과 더불어 죽림고회의 중심인물이었음. 이인로는 특히 시로 이름이 높았는데, <파한집>이라는 시 비평서를 남기기도 함. 이는 우리 문학사 최초의 시화집. (후대에 이를 본받아 고려 때 최차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의 시화집이 나옴.) 또한 <은대집>이라는 문집을 남겼으나 현전하지 않음.
임춘은 할아버지가 평장사, 아버지가 상서를 지낸 귀족 집안 출신.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피신해서 겨우 목숨을 건짐. 개경에 5년여 숨어지내다 가족을 이끌고 영남으로 피신해 7년 남짓 떠돌다가 다시 개경으로 올라옴. 평생 벼슬을 하지 못해 불우한 삶을 살다 마흔 무렵 생을 마감함.
임춘은 여기저기 많이 떠돌았고, 이 중에 강원도 강릉 일대의 산수를 유람하고 <동행기>라는 글을 짓기도 함. 이 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기(산수를 유람하고 쓴 글)이라는 점에서 주목됨. 조선 후기에는 유기가 많이 창작되었는데, 임춘의 <동행기>는 그 원류가 되는 글.
임춘의 문집 <서하집>(임춘이 죽은 뒤 이인로가 엮음.)은 현전하고 있는데, 이 문집에는 빈궁이나 현실에 대한 비분, 불만 등을 읊은 시가 여럿 실려있음.
ex) <손에 검을 잡다>(명종 4년,1174. 남쪽을 떠돌 때 쓴 시): ‘갑중의 서늘한 3척 검’을 노래함. 갑중의 검은 뜻을 펴지 못한 불우한 선비를 은유하는 말. 후대의 여러 시인들이 구사하기도 함.
문학사상 ‘시인적 자의식의 뚜렷한 표출’은 신라 말 최치원에 의해 처음 목도됨. 임춘과 최치원의 시는 불우감을 읊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나, 임춘의 시는 ‘궁수(곤궁에 대한 근심과 현실에 대한 비분의 감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최치원과 달라짐. 임춘이 <공방전>이라는 가전을 지은 것도 그가 극도의 곤궁을 겪으며 돈의 폐혜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임.
임춘은 최치원과 달리 지식인으로서, 문인으로서 극도의 생활고를 겪었고, 현실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가 더욱 어둡고 비관적인 색채를 띄게 됨. -> 임춘의 문학은 이 점에서 극도로 소외된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게 됨. 우리 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이라 할 수 있음.
오세재는 문신집안 출신으로, 무신정권 때 과거 급제를 했으나 벼슬은 하지 못했음. 이인로가 세 번이나 벼슬에 추천했지만 결국 벼슬을 하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며 삶.
오세재는 성격이 소탈하고 구속을 싫어하여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음.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하지 못했던 것은 이러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
오세재는 이규보보다 35살이 많았지만 망년우(나이를 초월한 벗)를 맺었음. 이규보는 오세재가 죽자 <오선생 덕전 애사>라는 그를 추모하는 글을 지음. 이 글에서 이규보는 오세재를 ‘복양 선생’이라고 칭하는데, 선생이라는 칭호는 당시 존경하는 사람에게만 붙였던 칭호.
황보항 역시 귀족 집안 출신, 미관 말직만을 했을 뿐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함. 함순도 귀족 집안 이었으나 최충헌 집권 당시 말단 관직을 지냈음.
이담지도 귀족 집안. 문헌공도(하급 관직)을 지냈음. 조통도 귀족 집안의 자제로 추정되는데, 운이 좋아 좌간의대부(정4품 관직)까지 지냄. 해좌칠현 중 이인로와 조통만이 어느정도의 벼슬을 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벼슬을 아예 못하거나 미관말직만을 지냈음.
-> 해좌칠현은 대체로 귀족 문신 집안 출신이며, 이 때문에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 해도 불평스러운 마음이 전연 없었다고 하기 어려움. 이들은 무신란 이후 문학장의 한 국면을 잘 보여주는 인물들.
김극기[편집 | 원본 편집]
김극기는 인물이지만, 하나의 ‘부류’이기도 함. 그만큼 당시의 문학 지형도에서 뚜렷하고 중대한 위상을 점함.
김극기의 이름은 이길 극(克) 자기 기(己)로, ‘자기를 극복한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임. 이는 전에 보지 못한 성찰적 지향을 갖는 이름.
김극기는 무신 집권기인 명종 때 급제해 한림 벼슬까지 했으나 벼슬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고, 벼슬을 그만둔 뒤 초야에 살면서 농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 이를 시에 담았음. 김극기는 지배층의 입장에서 농촌을 목가적으로만 그리지 않았고, 그 속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농민들의 실제 삶을 시에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음. -> 이 점에서 김극기는 재야 문인으로서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애민시를 선보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음.
애민시에서 民은 농민이나 어민을 뜻함. 당시는 농민이 백성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음. 기층적 존재로서, 농민이 없이는 지배층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음. 그러나 당시 농민들은 지배층에게 세금을 바치고, 지주에게 지대를 바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음. 지배층의 수탈이 극심했던 것. 무신정권 때 이러한 사정은 더욱 심각해짐. -> 김극기의 애민시는 이러한 배경에서 창작되었음.
김극기는 초야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사류(士类)였고, 명종 때 잠시 벼슬을 하기도 했으니 신진사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김극기의 애민시에는 지배층의 일원인 ‘나’의 ‘민’에 대한 성찰적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이 주목될만함. (나는 사대부 -> 사대부는 ‘민’으로 인해 먹고 살 수 있음. -> 그럼 나는 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이 김극기의 시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
ex) 동문선에 실린 <향촌에서 묵다>
: 시인의 눈에 비친 농민의 모습이 미화되거나 멸시되지 않고 질박한 모습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됨. 시의 뒷부분에서는 시인의 내적 번민을 느낄 수 있는데, 번민을 야기하는 고민이 사대부로서의 고민, 즉 민에 대한 사대부의 책임임.
즉, 사대부로서의 ‘민’에 대한 책임의식이 김극기로 하여금 농촌을 시에 담거나, 애민시를 창작하도록 추동한 것. 이런 인식의 문학적 표출은 이 시기에 와서 처음 나타나게 됨.
김극기는 이규보와 달리 시종 재야의 문인으로서 이러한 애민시를 창작하였음. 이 때문에 지배에 대한 반성적 성찰, 사대부라는 존재에 대한 내적 물음 피지배층 민에 대한 따뜻한 긍정과 연민의 시선 등이 표출될 수 있었음. 이러한 풍경의 표출을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 목도되는 것. 그러나 김극기의 애민시는 후대의 이규보 등의 애민시와 비교하면 현실 비판성, 반영적인 면모가 부족하다 할 수 있음. 그러나 김극기에서 시작된 애민시는 후대 우리 문학사에서 주요한 전통이 되게 됨.
김극기는 국토 여기저기를 떠돌며 많은 시를 남겼는데, 무신집권기에 최우의 명으로 문집 <김거사집>을 간행함. 총 135권(150권이라는 설도 있음.)으로 방대한 분량임. 이러한 규모의 문집은 우리 문학사에서 초유의 일이었고, 이를 통해 고려의 한문학이 크게 발전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음.
무신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문인들[편집 | 원본 편집]
무신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정권 유지에 기여한 문인들도 있었음.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한림별곡> 제 1연에 나타나있음.
- 한림: 한림원을 말함. 고려의 한림원은 왕명을 받들어 문장짓는 일을 맡았는데, 이곳에 속한 관원으로는 학사승지 1인, 학사 2인, 시독학사 1인, 시강학사 1인이었음. 한림원 학사는 문재가 있어야 맡을 수 있고, 임금을 가까이서 시종하여 영광스러운 벼슬로 간주됨.
<한림별곡> 제1연
元淳 文(원순 문) 仁老 詩(인로 시) 公老 四六(공로 사륙)
李正言(이정언) 陳翰林(진한림) 雙韻走筆(쌍운주필)
冲基(충기) 對策(대책) 光鈞(광균) 經義(경의) 良鏡(량경) 詩賦(시부)
위 試場(시장)ㅅ 景(경) 긔 엇더니잇고
(葉) 琴學士(금학사)의 玉笋門生(옥순문생) 琴學士(금학사)의 玉笋門生(옥순문생)
위 날 조차 몃부니잇고
-> 원순은 유원순, 인로는 이인로(이인로는 한림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언급되었지만, 거론된 사람들과는 성향이 다름.), 공로는 이공로, 이정언은 이규보, 진한림은 진화, 충기는 유충기, 광균은 민광균, 양경은 김양경, 금학사는 금의를 말함.
유승단은 고종의 사부로, 고문을 아주 잘하기로 유명했음. 참지정사(종2품)까지 올랐음.
이공로는 사륙변려문을 잘 지었으며, 벼슬은 정3품직인 추밀원 우부승선까지 지냄.
이규보는 <고려사>에 집안 선조에 대한 소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지방 향리 출신임. 명종 20년에 급제함.
진화는 조부가 진준(병졸로 시작해 능력을 인정받아 장군이 됨. 무신란 때 문인을 많이 구해줘 그 덕에 목숨을 건진 사람이 많았음.)의 아들. 무신란 이후 과거에 응시해 문인이 됨.
유충기는 대책(과거 응시자가 임금의 질문에 답한 글)을 잘 지은 문인. <고려사>에 집안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지방향리 출신인 것으로 보임.
민광균은 경의(경전의 뜻에 밝았던 문인), 역시 <고려사>에 선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지방 향리 출신으로 보임.
김양경은 시부에 능했던 문인으로, 나중에 인경으로 개명함. 문벌 귀족 출신이지만 무신정권에 잘 적응하여 형부상서까지 지냈음.
금위는 고위직인 평장사까지 지낸 인물. 지공거를 여러 번 맡아 많은 문생을 배출하기도 함. (그래서 <한림별곡>에 옥순문생이라고 언급된 것,) 문생과 지공거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기 때문에 문생이 많으면 세력이 더 큰 것이었음.
<고려사> 열전 금위전에 따르면 삼한공신 금용식의 후예로 되어 있는데, 그 뒤의 가계는 기술되지 않음. -> 금위의 집안이 금위로 인해 번창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음.
금위는 최충헌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하였던 것으로 보임. <한림별곡>에 언급된 인물 중 가장 벼슬이 높았음.
=> 한림별곡 제1연에 언급된 인물들은 대체로 무신정권에 득의한 인물들이고, 지방 향리 출신이거나 한미한 집안 출신인 것으로 보임. 무신란 이후 문인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 기용된 신진사류들이었음.
이규보와 진화[편집 | 원본 편집]
<한림별곡>에 등장하는 문인 중 이 시기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이규보와 진화. 이들은 고려 전기의 귀족 문인과 구별되는 신진사류의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었음.
이규보는 25살에 <백운거사전>과 <백운거사어록>을 지었음. 이 글들은 벼슬하기 전에 지었던 글들로 자전임. 제목에 붙어 있는 ‘백운거사’는 이규보의 호. -> 이를 통해 이규보가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며,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
<백운거사전>과 <백운거사어록>은 우리 문학사 최초의 자전.
“백운은 내가 사모하는 것이다. 사모하여 그를 배운다면 비록 그 실을 얻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비슷해지기는 할 것이다. 대저 구름이라는 것은 바람을 따라 흘러가 산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며 하늘에 매여 있지도 않다. (...) 뭉게뭉게 퍼져 나가는 모양은 군자가 세상에 나아가는 것과 같고, 오므려 자신을 마는 모양은 고상한 사람이 은거함과 같다.” - <백운거사어록>
-> 이규보는 이러한 백운을 배워 세상에 나아가 ‘물’을 윤택하게 하고, 세상에서 물러나서는 마음을 비워 흰빛을 지키겠노라고 말함. 물은 백성 / 국가. 사대부의 도리를 천명한 것.
<백운거사전>에서는 자신의 본성이 방광하고 무검하다고 말함. -> 자유롭고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 또 ‘나는 도연명과 같은 무리로 거문고를 연주하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말도 있음. 이러한 내용은 <한림별곡>의 내용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음.
=> 이규보의 두 글 속에는 자유롭고 방달하며 진취적인 정신이 느껴짐. 이러한 감수성은 세련되고 폐쇄적인 고려 전기 귀족문인의 미의식과는 차이가 있음.
진화는 글을 잘 지어 당대 이규보와 더불어 뛰어난 문인으로 불렸음. <고려사> 열전 윤곤전에 부기된 윤세유전에
최충현이 이규보와 진화를 불러 시를 짓게해 한림 금의로 하여금 평가하게 했는데, 이규보가 1등, 진화가 2등을 했다는 말이 있음.
진화의 시로는 금나라에 사신 가면서 지은 시인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들어가다>가 유명함.
“서쪽 중국은 이미 쇠잔하고 / 북쪽 변방은 아직 몽매하도다. / 앉아서 환한 아침 기다리나니 / 동쪽 하늘에 붉은 해가 떠오르려 하네.”
-> 진화의 시는 단문이지만 기상이 높고 그 스케일이 방대함. 서쪽 중국은 남송을, 북쪽 변방은 금나라를 가리킴. 국제 정세를 읽으며 결국 동아시아의 문명은 동쪽 땅 고려에 기대야 한다는 내용. 시인의 고려에 대한 자긍심이 나타남.
즉, 진화의 시에서는 동아시아에 대한 사유와 함께 진취적인 민족적 의식이 드러난다 할 수 있음.
세 부류 비교[편집 | 원본 편집]
해좌칠현 | 김극기 | <한림별곡>의 문인들 |
불우한 문인의 내면 풍경, 세계와 불화한 문인의 자의식을 보여준다는 의의가 있음. | ‘실의’와 ‘득의’ 사이에서 자기대로의 문학적 방향을 모색함.
김극기로 하여금 한국 한시에 하위 주체인 농민의 모습이 등장하게 됨. |
고려전기의 귀족들과 다른 출신성분을 지님. 따라서 이들과 다른 감수성과 미의식을 보여줌. |
대체로 구 귀족 문신 집안 출신 | 벼슬에서 내려와 초야에서 지내며 농촌의 삶을 묘사함 +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국토의 풍경을 그려냄. | 무신정권에서 득세한 신진사류 |
실의한 자의 문학
(어두운 시 시계) |
해좌칠현과 <한림별곡> 문인의 중간 지점. | 득의한 자의 문학
(의기양양한 의식 표출) |
-> 무신란 이후의 문학은 세 부류 문인의 멘탈리티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파악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음.
<한림별곡>[편집 | 원본 편집]
<한림별곡>은 총8연으로 구성되어 있음.
唐漢書(당한서) 莊老子(장노자) 韓柳文集(한류문집)
李杜集(이두집) 蘭臺集(란대집) 白樂天集(백락천집)
毛詩(모시) 尙書(상서) 周易(주역) 春秋(춘추) 周戴禮記(주대예기)
위 註(주)조쳐 내외온 景(경) 긔 엇더니잇고
(葉) 太平光記(태평광기) 四百餘卷(사백여권) 太平光記(태평광기) 四百餘卷(사백여권)
위 歷覽(역람)ㅅ 景(경) 긔 엇더니잇고
-> 당한서는 역사서인 <당서>와 <한서>를 말하고, 장노자는 도가의 책인 <장자>와 <노자>를 말함.
한유문집은 당나라의 문장가인 한유와 유종원의 문집, 이두집은 당나라 시인인 이백과 두보의 시집, 난대집은 후한의 역사가 반고의 문집인 <반난대집>을 말하며, <백락천집>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문집을 말함. 모시상서는 <시경>과 <상서>, 주역춘추는 <주역>과 <춘추> 주례대기는 <주례>와 <대기(예기)>를 말함. -> 모두 유교의 경전에 해당함.
이러한 책들을 주석까지 늘 외는 광경이 어떻냐고 말하며 자랑스러워하며, <태평광기>를 차례로 다 보는 광경이 어떠하냐고 물음. 이야기챡을 마음껏 읽으며 즐기는 생활을 뽐내는 말.
제3연은 서예, 4연은 술, 5연은 꽃, 6연은 악기를 노래하고 있음.
이를 통해 <한림별곡>은 무신정권 때 문학적 능력을 인정받아 득의한 처지에 있던 신진사류 문인들의 취미와 풍류를 보여주고 있음. 따라서 당시 득의한 신진사류의 멘탈리티를 잘 보여주는 글이라 할 수 있음.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고종 연간에 한림제유(여러 유사)들이 창작하였음. 제유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한 연씩 지어 부른 노래로 추정됨.
<한림별곡>은 경기체가로 불리는데, 이는 노래 중에 ‘경 긔 어떠하니 잇고’라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임. 경기체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 보는 형식의 노래.
또한 향가 등과 달리 경기체가에는 우리말은 거의 구사되지 않고 대부분이 한자어임. 이는 노래의 지은이들이 한문학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으로 보임. 당시 고려에서는 송사(송나라의 노래. 자수율을 중시함.)가 유행했는데, 송사와 비슷하게 경기체가도 자수율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아 <한림별곡>을 지은 문인들이 송사를 많이 접했던 것으로 보임.
<한림별곡>은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율격을 따르고 있음. 전부 6구로 되어 있고, 1구와 2구의 자수율은 3,3,4 / 3구는 4.4.4, (연에 따라 3구의 자수율은 변화함)
기본 패턴의 리듬이 있고, 약간의 변화가 허용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음. <한림별곡>에 언급된 인물들이 이러한 규칙으로 노래를 연달아 부르며 지었을 것으로 보임.
<한림별곡>은 풍경이 쭉 제시되고 있는 특징이 보임. 문인이나, 책, 글씨 등이 나열되고 있는데, 이 대상들은 노래를 지은 이들의 ‘자아’가 투상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함.
또한 그 내용이 회고적이거나 윤리적, 술회적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풍류적, 유흥적, 과시적 면모가 강하게 나타남. (이황의 경우 <한림별곡>이 ‘긍호방탕’하기 때문에 군자가 숭상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음.)
<한림별곡>의 경우 내부를 향한 ‘내면성’보다는 외부를 향한 ‘외면성’이 두드러지는 노래라고 할 수 있음. 하지만, <한림별곡>에 내면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의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음. <한림별곡>에는 무신 집권기에 활동하고, 득의한 신진사류의 자아의식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
<한림별곡>에서 드러나는 신진사류의 자아의식은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의식과는 다른 면모를 드러냄.
-> ex) <한림별곡>의 2연: <노자>, <태평광기>, <장자> 등이 거론됨. (당시 신진사류들이 즐겨 읽은 것으로 보이는 책) 고려 말 신흥사대부나 조선시대 사대부들 역시 즐겨읽었던 책이지만, 그들은 신진사류보다 좀 더 깊은 유교체계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경전’과 ‘잡서’를 엄밀하게 구별했음. 따라서 ‘유교경전’, ‘중국 대표적인 문학가의 책’을 언급할 때 이러한 종류의 책을 언급하지는 않았음.
<한림별곡>의 5연: 꽃을 노래하는 구절. 가장 먼저 거론된 꽃이 모란과 작약인데, 이들은 크고 화려해서 부와 화려한 아름다움을 상징함. 그 다음으로는 어류(석류꽃), 옥매(매화), 장미, 지지(백지와 영지), 동백을 거론. -> 이 구절에서는 신진사류의 미의식이 드러남. 일반적으로 사대부의 심상을 표현하는 화훼로 거론되는 난국죽+송은 거론되지 않고, 매화는 모란과 작약 이후로 거론되고 있음. =>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 조선조의 사대부들과는 그 지향의식이 다름.
<한림별곡>에서는 신진사류들이 지니고 있던 파토스는 표현되고 있지만, 에토스는 발견되지 않음.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후대의 문학사에서 등장하는 충신연주의 감정이나 풍간의 태도들은 발견되지 않음. -> 이는 이들이 무신정권에 봉사하는 기능적 문인/지식인이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할 수 있음. (파토스/에토스?)
경기체가의 행방[편집 | 원본 편집]
<한림별곡>을 계승하여 고려말 안축의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의 경기체가가 지어짐. -> 시상이 강원도 및 경상도 풍기의 풍경임.
후대의 경기체가는 <한림별곡>과 시상이 달라지면서 자아의식과 미의식도 달라져, 산수 자연을 완상하는 시선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음.
조선 초에는 권근의 <상대별곡>, 변계량의 <화산별곡>이 나타남. <상대별곡>의 상대는 사헌부의 별칭. <화산별곡>의 화산은 삼각산을 의미하는데, 도읍인 한양을 뜻하는 말. 세종조의 성대함을 노래하고 있음.
- 사헌부: 관리들을 규율하고 감찰하는 역할과 임금에게 직언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곳.
<상대별곡>과 <화산별곡>은 모두 <한림별곡>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송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생김. -> 이들 노래는 경기체가이면서도 악장의 면모를 가지고 있어 궁중 연악으로 쓰이기도 했음.
*<한림별곡>에서 명사들이 나열되는 이유[편집 | 원본 편집]
: <한림별곡>은 명사들이 쭉 나열되는 형식을 취고 있음. 이러한 형식은 한림에 진출한 신진사류 집단의 멘탈리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음.
이들은 사물의 나열을 통해 자신의 취향과 긍지를 표현하고자 하였음. 시조에서도 사물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는 비유나 시적 상관물임. 그러나 <한림별곡> 속 사물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짐. 이러한 사물(명사)의 나열을 통해 신진사류들은 자아를 확인하고 드러내고자 하였음.
<한림별곡> 속의 사물들에는 자아가 투사되어 있고, 이 사물들은 자아의 애호물이기 때문에 자아와 분리되지 않음.
명사의 나열을 통한 자아의 외면적 확인과 현시는 흥취를 발산하는 것에는 유리하지만, 자아의 내면적 응시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음. (자아의 내면적 응시는 명사만이 아닌 술어가 필요하기 때문) 따라서 후대의 사대부들은 자아의 내면적 응시가 가능한 시조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임. (경기체가와 시조에서 자아의 시선은 정반대라 할 수 있음.)
-윤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