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강 야담의 성행과 『청구야담』
조선 후기에 출현한 서사 장르, 야담[편집 | 원본 편집]
조선 후기에 출현한 서사 장르: 국문소설, 판소리,-> 우리말 장르 / 한문장편소설, 전계소설, 야담. -> 한문 장르
야담: 주로 시정에 유포된 민간의 이야기가 작가에 의해 한문으로 기록된 것. 짧은 형식의 서사 장르(단형서사).
구전되던 이야기를 한문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 야담은 기록문학과 구전문학의 성격을 모두 가진 장르. (이런 점에서 판소리와 비슷함. 둘 다 민중적 지향을 가짐.)
하지만 야담은 한문으로 된 장르라는 점에서 사대부적 지향도 가짐. (민중 문학으로서의 성격과 사대부문학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가짐.)
=>야담은 구전되던 이야기를 한문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기록문학/구전문학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사대부적 지향/민중적 지향도 가짐.
구전되던 이야기를 한문으로 기록하는 것은 이전부터 이어오던 전통. Ex) 신라말 최치원의 <수이전>, 고려말<삼국유사>, 조선 전기<용재총화> -> 지괴류, 조선 초 <태평한화골계전>, <촌담해이>, 16세기 송세림 <어면순> -> 소화류
=>즉, 지괴와 소화는 야담의 선형태(필기, 패설)라 할 수 있음. 하지만 지괴, 소화는 비교적 짧고 문학적 윤색이 많지 않은데, 야담은 비교적 길이가 길고 문학적 윤색이 많다는 점에서 이 두 장르는 본질상 다름.
지괴, 소화는 민간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목표, 야담은 재미있는 서사작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임. 창작적 목적의식이 한층 뚜렷해진 것.
조선 후기는 ‘야담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야담의 창작과 향수가 성행했음. 17-19세기의 야담집중 대표적인 것이 <청구야담> -> 여러 야담집 중 내용의 풍부함, 문예적 성취가 가장 뛰어남.
<청구야담>은 어떤 책인가[편집 | 원본 편집]
서명에 ‘야담’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최초의 책은 <어우야담>, 어우는 유몽인의 호, 유몽인 사망 2년 전인 1621년에 저술됨. -> 그러나 <어우야담>은 본격적인 야담집은 아님.
<청구야담>은 여러 작가가 쓴 야담을 모아놓은 책. 편찬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음. (19세기 후반 저술된 <동야휘집>에는 앞시대의 야담과 함께 편찬자 자신이 지은 야담도 함께 실어 놓았음. -> 이러한 예를 보면 <청구야담>도 편찬자가 자신의 야담을 실어 놓았을 수도 있음.)
<청구야담> 속 수록된 작품을 통해 편찬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데, 1820년대 중반 이후로 보임. 적어도 19세기 중엽 이전. 수록 작품은 이본에 따라 다르지만 약 290편쯤 됨.
<청구야담>에는 매 작품마다 일곱 자 내지 여덟 자의 제목이 붙어 있음.
Ex) 이절도궁도우가인 – 이절도사가 궁할 때 가인을 만나다 / 청취우약상득자 – 소낙비 소리를 듣다가 약주릅(약재 거간꾼)이 아들과 상봉하다.(…)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짐작이 가능함.
구연 단계의 야담[편집 | 원본 편집]
야담은 구연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구연 단계 / 기록 단계로 나누어서 살펴보아야 함.
-구연단계[편집 | 원본 편집]
<청구야담>에 수록된 야담들은 대체로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엽 사이에 구전되던 이야기들로 추정됨. 따라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엽 사이에 구전되던 이야기를 수록한 <어우야담>에 비해 야담의 길이가 훨씬 김. -> 길이가 길기 때문에 서사에 기복과 파란이 많음.
<어우야담>에 비해 <청구야담>은 이야기가 길어지고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구연됨. -> 이는 도시 시정인의 서사적 요구와 관련이 있음.
- 시정인: 상인, 수공업자 같은 서민이나 양반집의 겸인, 도시의 몰락 양반, 여항인 등의 서민과 중간계급을 망라한 개념.
이전의 짧은 구전 서사물이나 비현실적인 구전 서사물로는 이들의 변화된 인식적 요구 및 오락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음. ->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화폐 경제가 확대되면서 삶의 조건이 크게 달라졌고, 이로 인해 서사적 요구가 달라짐.
1. 농민층의 분해
: 17세기 후반 이래 도시에서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며 농촌의 빈농, 소농들은 무토민이나 유랑민으로 전락하고, 일부의 부농층이 성립됨. (유랑민이 된 농민들은 도시에서 걸식하거나 향촌에서 품을 파는 노동자가 됨. 혹은 도적이 되기도 함.)
2.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로 인한 평민, 중인층 신흥 부자의 대두
: 특히 중인층 역관은 중국,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17세기 이래 부를 축적했음. -> 이렇게 축적한 부를 상업자본이나 고리대 자본으로 활용해 큰 부를 축적함. 부상대고와 함께 중소 상인과 수공업자도 성장함.
3. 신분 질서의 동요
: 신흥 부자의 형성은 하층민의 신분 상승 욕구를 부추겼고,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거나 노비 신분을 속량하고자 함. -> 기층부의 변화
양반 내부에서도 벼슬을 하지 못하는 몰락 양반들이 대두함. -> 상층에서의 변화
=>이러한 변화로 인해 도시 시정 공간의 백성들에게는 변화된 현실과 삶의 조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생겨남. (변화된 서사적 요구)
<청구야담>의 야담에는 상하층의 인물이 모두 등장함. 그러나 모든 이야기에 도시 시정인의 생활 감각과 사유 방식이 강하게 침투되어 있음. 그리고 몇몇 농촌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도 도시민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 회자된 이야기로 보임. -> <청구야담>의 야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도시’적 감각과 관심.
변화한 인식적 요구는 흥미, 오락적 요구와 별개는 아님.(문학에서 인식소와 흥미소의 결합은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 인식소가 충족될 때 오락적 욕구도 충족되며, 인식소 없이는 공허해지기 때문)-> 이전의 짧은 이야기들도 나름의 인식소를 담고 있었지만 17세기 이후 변화한 현실을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어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했을 것.
새로운 이야기의 구연과 향수의 중심은 주로 시정인. (시정세계에 관심을 가진 한사(寒士)도 유포에 참여했을 수 있음.) -> 책과 지식에 접근이 어려웠던 시정인들은 구전 유포되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당대 사회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수 있었음.
<소낙비 소리를 듣다가 약주릅이 아들과 상봉하다.>의 앞부분
약주릅 노인이 방 안에 있다가 문득 말머리를 꺼냈다. “오늘 비가 내 소싯적 새재를 넘을 때 비 같구먼.”(…) “그때 내가 좀 우스운 일이 있어서 여태 잊히질 않네 그려.” 약주릅 노인이 이야기를 꺼냈다.
ㅡ> 당대 시정인의 체험이 구전 서사를 낳는 양상을 보여줌.
=> 조선 후기 사회역사적 발전에 따라 시정인의 인식력은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정립됨. -> 따라서 새로운 서사장르가 요청되었음. (인식적 욕구임과 동시에 오락적 욕구,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두 욕구의 통합을 보여주진 않음.)
=> 그러나 야담과 판소리는 대부분 인식소와 흥미소가 함께 나타남. -> 17세기 후반에 나타나 조선 후기의 사회역사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장르들. 사회가 변화하며 나타난 새로운 인식적 욕구가 오락적 욕구와 결합해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짐.
(그러나 판소리는 처음부터 흥행을 고려하며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야담과 미적 전개 방향이 달라짐. 또, 시정을 중심으로 하는 야담과 달리 판소리는 향촌에서 기층민을 상대로 공연하다가, 이후 다른 지방 도시, 서울에까지 진풀하며 새로운 래퍼토리가 생기게 됨. Ex) <배비장타령>, <왈짜타령> 등
<청구야담>에 수록된 야담에는 현실을 다룬 이야기가 많으나, 초현실적인 서사도 공존하고 있음. -> 조선 후기 도시 시정인의 인식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발전했으나, 그럼에도 인식 내부에 비현실적이거나 신비한 면이 존재했음. <청구야담> 속 비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
하지만 <청구야담>의 이야기 중에는 비현실적인 내용이더라도 결국 현실과의 의미 연관을 이루는 이야기가 적지 않음
Ex) <밥상을 차려 줬다가 귀신에게 곤욕을 치르다.>
è 비현실적인 서사를 보여주지만 그 속의 메세지는 19세기 몰락 양반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여줌.
당시 몰락 양반들은 남의 신세를 지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행태를 귀신으로 형상화함. 알레고리적으로 몰락 양반의 행태를 그려냄으로써 독특한 방식으로 현실의 한 단면을 반영함.
=><청구야담>에는 이처럼 비현실적인 서사에서도 인식소와 흥미소의 결합이 확인됨.
기록 단계의 야담[편집 | 원본 편집]
도시 시정 세계를 중심으로 구연, 유포되던 이야기는 특정 문인에 의해 한문으로 기록됨. -> 이러한 야담의 성격 때문에 기록자의 성격이 문제가 됨.
야담의 기록자: 대부분 사(士)계층에 속한 인물. 이들은 벼슬하지 못하고 가난하게 지내거나, 음직으로 말단 벼슬을 했음. / 벌열층이나 중인층에 속한 작자도 있었음.
사 계층은 벌열층에 비해 시정인들과 자주 접촉했고, 그들의 동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음. 따라서 그 세계에 견문이 많았고, 떠도는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기도 쉬웠을 것.
야담 작자는 시정의 이야기꾼과 접촉해 이야기를 듣거나
Ex) <오물음이 우스갯소리를 잘해 인색한 객을 넌지시 깨우치다> -> 오물음은 당시 시정의 유명한 이야깃꾼.
혹은 몰락 양반, 시정의 상공인, 무변, 청지기 등에게서도 시정에 떠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음. ->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시정의 이야기를 접하고 이를 기록해 상품화함.
작자가 들은 것을 ‘기록’한다는 것이
1.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적음
2. 작자의 창의가 다소간 가미되었는지
에 대한 의문이 제기됨.
<청구야담>의 작품은 대부분 작자의 창의성이 가미된 것으로 보임. 그러나 ‘원래 이야기’의 틀 안에서 가미되고 있을 뿐, 이야기의 구성이나 내용을 바꾸지는 않음. (문학적 수식을 곁들이는 정도.)
그러나 유능한 야담 작가는 원래 이야기에 내용을 부연하거나 인물의 성격과 같은 세부 묘사를 더 자세하게 하기도 함.
Ex) <열여섯 낭자와 꽃다운 인연을 맺다.>: 원래 이현기의 <기리총화>라는 책에 실려있던 것을 <청구야담>에 선록함. 현재 알려진 야담 가운데 최고의 문예적 수준을 보여줌.
몰락해 가는 양반 집안의 인물인 채생과 중인 집안의 인물을 등장시켜 대조적 생활 정형과 인물 성격, 인물의 심리 상태를 곡진하게 묘사하고 있음. -> 18세기 조선 역사의 주요한 국면을 실감나게 표현함. 형식면에서도 세련된 구성과 기교를 보임.
->이현기는 시정에 구전되던 이야기에 전대 전기소설의 수법을 적절히 원용하여 빼어난 소설을 만들어냄.
- <기리총화>: ‘기리’는 이현기의 호. ‘총화’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라는 뜻.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소론 출신 이현기가 저술한 책.
이처럼 작자의 창의가 발휘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 <청구야담>의 이야기들은 이야기의 원래 내용과 전개를 따르며 약간의 문학적 윤색이 가미된 것들이 많음.
->따라서 현란한 수식이 별로 없고, 소박한 문체적 특징을 가짐. 또한 우리말을 한문으로 옮겨놓은 듯한 ‘조선식 한문’이 구사되어 우리말의 구기가 느껴짐.
이러한 점에서 문어체로 구성되고 화려한 문장수식이 나타나는 전기소설과는 대조적.
야담계 소설 – 전기소설, 전계소설과의 대비를 통해서 본[편집 | 원본 편집]
야담은 민담, 전설, 소화, 일화, 단편소설과 같은 몇 개의 단형 서사 장르로 구성되어 있음. 이중 가장 문예성이 뛰어난 것은 단편소설.
야담의 단편소설을 ‘야담계 단편소설(야담계 소설)’이라고 칭하는데, <청구야담>에 많이 수록되어 있음.
한문 단편소설 중에는 전기소설, 전계소설, 야담계 소설이 주목됨.
전기소설: 나말여초에 성립됨. <조신전>, <호원>, <최치원>등이 당시 작품
전계소설: 고려시대에 성립. <삼국사기> 온달전, 설씨전, <고려사> 열전의 김천전 등
야담계 소설: 조선 후기 정립.
->조선 후기는 소설이 성행하며, 소설 외의 장르들이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게됨. (ex) 가사의 서사화, 전의 소설화 경향) 이로인해 조선 후기 전계소설의 창작이 늘어나게 됨.
전기소설과 전계소설, 야담계 소설은 발생에 있어 사회역사적 토대의 차이가 있고, 이러한 차이 때문에 발생 과정, 담당층, 작품의 형식적 원리와 내용 등에서 상이함을 보임.
전기소설, 전계 소설: 사대부적 멘탈리티, 사대부적 관심에서 성립됨. 따라서 소재 선택의 범위와 서사 공간도 사대부 세계에 한정됨. 조선 후기의 전계 소설은 하층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하기도 하나, 상층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창작된 경우가 많음.
야담계 소설: 시정인의 관심, 멘탈리티, 현실에 근거함. 따라서 소재와 서사 공간이 이전에 비해 확대됨
=>세 장르는 조선 후기 공존하며 영향을 미침. 특히 전계 소설의 경우 소재나 내용에 있어 야담계 소설의 정취를 보여주는 것들이 많음. (민중의 삶과 현실을 소재로 함)
즉, 시정에 떠도는 이야기를 전이라는 형식에 담으면 전계 소설이 되고, 야담의 형식에 담으면 야담계 소설이 되는 것.
형식이 다르기에 문체도 달라지나(전계소설: 인물에 관심을 가짐. / 야담계 소설: 사건에관심을 둠) 그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함.
전기소설, 전계소설 | 야담계 소설 | |
형식 원리 | 사대부적 세계관에 기반 | 민중적 세계관에 기반 |
문체 | 사대부적 취미와 교양을 반영 -> 세련됨
문어체로 우리말 어투가 잘 느껴지지 않음. |
문체가 투박하고 비속함.
구어체에 가까워 우리말 어투가 느껴짐 -> 구어적 생기가 있음. |
전계 소설은 시정의 이야기가 작품화 된 것이라 해도 이야기가 그저 작품의 소재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음. (야담계 소설처럼 직접 기록화한 것이 아님.)
Ex) 박지원의 <광문자전>: 청지기에게 들은 시정에 떠도는 이야기를 원천으로 하여 ‘전’의 형식에 맞게 재조직화함.
따라서 전계 소설은 전이라는 장르 관습에 맞게 이야기를 재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사대부적 교양과 문예 취미가 문체게 짙게 표출될 수밖에 없었음.
그에 반해 야담계 소설에는 확립된 장르관습이 없었기 때문에 작자가 전통을 의식하거나 장르 문법의 구속을 받을 필요없이 들은 이야기를 가다듬기만 하면 되었음.
전계 소설은 18세기에 이르러 소재의 확장이 나타남. Ex) 피카레스크적 인물형의 사기꾼을 그린 이옥의 <이홍전>, 불우한 예술가를 그린 유득공의 <유우춘전>
그럼에도 아둔한 양반, 무능한 관리, 도망해서 신분 상승을 꾀하는 노비 등 다채로운 소재의 야담계 소설에 비하면 범위가 한정된 것임을 알 수 있음.
야담계 소설은 당대의 일상적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 인간들의 구체적 관계가 그 중심을 이룸. -> 이러한 점에서 근대 단편 소설에 근접해있다고 할 수 있음.
야담계 소설에서 가장 현저하고 주목되는 것은 양반과 평, 천민간의 대립이고, 이들의 대립은 극히 격렬하고 첨예함.
또한 기본적으로 시정 세계의 관심과 취미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부의 성취에 대한 관심과 신분 상승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음. -> 그러나 모든 소설이 세태적인 것은 아니고, 다양한 인간 주체를 긍정하며 삶의 다양한 국면으로 소설적 관심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의 새로운 진전을 이룬 장르.
(다만 사건 위주의 서술을 해 내면에 대한 깊은 응시를 하거나,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인식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가짐.)
야담사와 <청구야담>[편집 | 원본 편집]
최초의 야담집 <어우야담>[편집 | 원본 편집]
: 야담만이 아니라 작자의 신변사나 논설따위로 실림 -> 따라서 본격적인 야담집이라고 하기는 어려움. <어우야담>의 이러한 면모는 야담이 필기류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고, <어우야담>이 필기의 특징이 남아 있는 과도기적 작품임을 보여줌.
- 필기: 사대부 문인이 자신의 관심사, 자기 신변의 일들, 견문한 내용이나 독후감, 단상, 학문적 논변 등을 자유로운 필치로 기록해 놓은 글. -> 사대부의 생활상의 요구와 밀착된 글쓰기.
즉, 18~19세기의 야담집은 필기류에 포함되어 있던 전설, 일화, 소설 등의 서사 장르를 독립시킨 것임.
<어우야담>에 실린 서사물 대부분은 일화와 전설이고, 소설은 많지 않음. 작자가 견문한 사실의 골격만 짧막하게 전달하여 길이가 짧고 풍부한 서사를 보여주지는 못함.
그에 반해 <청구야담>에 실린 전설이나 일화는 비교적 풍부한 서사를 펼쳐 편폭이 보다 길어짐.
임방의 <천예록>[편집 | 원본 편집]
: 18세기 초 저술됨. ‘천예’는 <장자>에 나오는 언어로, ‘신비한 일’을 나타냄. 즉, 천예록은 신비한 일에 대한 기록.
<천예록>은 <어우야담>과 달리 필기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문학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야담집에 해당함.
이름에 걸맞게 도가적 지향을 갖는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있어 황당무계하고 환상적인 성격의 이야기들이 많이 보임.
18세기의 야담들[편집 | 원본 편집]
18세기의 야담 작가로는 임방, 임매, 안석경, 노명흠, 신돈복 등이 있는데, 이들은 벼슬을 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말직의 벼슬을 했을 뿐임.
임매는 임방의 손자로, <잡기고담>이라는 야담집을 저술하기도 함. ‘옛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뜻. 노명흠은 <동패낙송>(동국의 패설을 줄줄외다)를 저술함. 형편이 공궁해 홍봉한의 집 숙사 노릇을 했는데, 이때 저술한 것으로 보임. 10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제목은 붙어 있지 않음. <동패낙송>의 이야기 중 <치산업허중자성부>는 <청구야담>에도 실려 있음. (문장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음.)
안석경은 1770년대 초반에 <삽교만록>이라는 필기서를 저술하고, 신돈복은 18세기 후반, 자신의 만년에 <학산한언>이라는 필기서를 저술함. -> 이 두 필기서에도 여러 편의 야담이 실려있는데, 제목은 없음. <청구야담>에 <학산한언>의 야담 30편이 전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목될만함.
Ex) <청구야담> 속 이절도궁도우가인, 거강포규중정렬 등
또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의 후재 김간이 저술한 필기서 <후재수록>의 이야기 중 4편이 <청구야담>에 전재되었음. <후재수록>에 수록된 이야기에는 작품 말미 작자의 논평이 첨부되어 있기도 한데, <청구야담>에서는 모두 삭제됨.
-><청구야담>의 작자는 이야기를 수록할 때 군더더기는 모두 삭제하고 서사만 가져와 완정한 야담이 되도록함.
19세기의 야담들[편집 | 원본 편집]
19세기 경기도 광주!!에 살던 만오 정현동은 <만오만필>이라는 필기, 야담집을 저술함. 야담집의 작자는 주로 노론계 인사인데, 정현동(남인)과 이현기(소론)는 노론이 아님.
<만오만필>의 상권에는 야담이 실려있고, 하권에는 사대부 일화를 중심으로 한 짤막한 고사가 실려 있는데, 제목은 붙어 있지 않음. 편폭이 제법 긴 이야기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짧음.
정현동은 이야기에 관심은 있었으나 야담 작가로서의 필치는 부족해보임. Ex) 46화 호랑이를 감동시킨 효부의 이야기가 <청구야담>의 수정절최효부감과 비슷하지만 서사의 묘미가 부족함.
계서 이희평은 1828년 필기서 <계서잡록>을 저술함. 거창 부사로 있을 당시 완성했고, 이희평은 벌열층에 속한 인물.
여러 흥미로운 야담이 실려있고, 제목은 붙어있지 않음. <동패낙송>의 이야기들이 더러 있어 <동패낙송>을 읽었던 것으로 보임.
이현기의 <기리총화>는 19세기 전반 저술되었고, 이야기에 대게 4자의 이름이 붙어 있음. Ex) 포주이문(포주의 이상한 이야기), 채생기우(채생의 기이한 만남), 심가귀괴(심씨집 귀신이야기), 천비식인(천한 여종이 사람을 알아본다) 등
이중 채생기우, 심가귀괴, 천비식인은 <청구야담>에 전재되면서 결방연이팔낭자(열여섯낭자와 꽃다운 인연을 맺다), 궤반탁견곤귀매(밥상을 차려 줬다가 귀신에게 곤욕을 치르다), 택부서혜비식인(지혜로운 여종이 사람을 알아봐 남편을 택하다)7자 제목으로 바뀌어짐. -> <청구야담>의 제목이 독자의 흥미를 훨씬 자아냄.
이현기는 야담작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보임. -> 작품에 인물의 개성이 뚜렷하고, 정황에 대한 묘사가 정채있음. 또한 사회적 문제의식, 정치의식이 작품 속에 들어있기도 함.
(ex) 포주이문: 북벌론의 허상과 인재 등용의 문제점 지적, 채생기우: 조선 후기의 신분제적 모순을 인물들 간의 갈등과 내면 심리 묘사를 통해 포착해냄. -> 조선 후기 야담 문학의 최고 성취라고 할 수 있음.)
이러한 작품들이 <청구야담>에 수록되면서 <청구야담>은 더욱 정채를 가지게 됨.
19세기에는 <청구야담>, <계서야담>, <동야휘집> ‘3대 야담집‘이 편찬됨. -> 18세기에는 없던 현상. 이를 통해 19세기가 야담이 집대성되는 단계였음을 알 수 있음.
<계서야담>은 계서 이희평이 죽은 뒤 <계서잡록>에 실린 야담을 토대로 엮은 책으로 보임. 3대 야담집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야기에 제목이 있지는 않음.
<동야휘집>은 1869년 이원명이 편찬한 야담집. ‘동국의 야담을 모아 놓은 책‘이라는 뜻.
<어우야담>이나 <기문총화>와 같은 전대 야담집에 실린 야담을 윤색해서 싣기도 하고, 편찬자가 들은 민간의 이야기도 기록해 놓았음. 다만 <동야휘집>은 편찬자가 수식을 지나치게 많이 가하여 이야기의 생동감이 사라지고 사대부적 미의식이 강화되어 야담 특유의 정취가 잘 느껴지지 않음.
- <기문총화>: 19세기 중반 이후 <계서잡록>을 토대로 엮어진 편자 미상의 야담집
<금계필담>은 1872년 고종 10년에 서유영이 저술함. 서유영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금계에서 살 때 저술됨. 철종 14년(1863) <육미당기>라는 한문장편소설을 창작하기도 함.
‘좌해일사(우리나라 야사)‘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부제에서 보이듯 야담보다는 야사에 가까운 작품들이 많이 실림. 간간히 야담도 발견되지만 그 필치가 뛰어나지는 않고, 심각한 주제의식을 지닌 작품도 없음.
19세기 말 차산 배전이 <차산필담>이라는 야담집을 저술했음. 배전은 중인층이기 때문에 중인층의 야담집이라는 점에서 주목됨. 16편의 야담이 실려 있고, 작품마다 제목이 있음.
대원군 집정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도 있어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지만, <청구야담>만큼의 생기발랄한 면모는 찾을 수 없음. 이러한 점에서 <차산필담>, <동야휘집>은 야담 쇠락기의 산물로 여겨짐.
야담은 시정인층과 문인층의 합작품으로써의 성격을 지님. 시정인이나 여성의 경우 국문으로 된 야담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임. (전근대 시기 <천예록>, <동패낙송>, <청구야담>이 국문으로 번역된 것은 이러한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보임.)
그러나 번역이 아닌 국문으로 창작된 야담은 나타나지 않았음. 19세기 후반 야담의 정체는 이러한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 (과거의 전통(한문창작)을 따를 뿐 새로운 돌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19세기 중엽 이후 야담의 행방[편집 | 원본 편집]
19세기 중엽 이후 야담의 양상은 <동야휘집>과 <차산필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
<동야휘집>의 야담에서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야담이 보여주는 생기발랄함이나 현실적 연관성을 찾을 수 없음. -> 매너리즘화 된 것. 따라서 19세기 후반에 야담은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음. (<차산필담>도 마찬가지)
->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야담은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음.
1. 19세기 후반 경 도시 시정 공간의 문화적 활기가 떨어짐.
2. 문인들이 시정의 구전 서사에 관심을 덜 가지게 됨.
-> 시정공간의 문화적 활기가 떨어지며 이러한 이유로 야담이 현실 반영의 면모를 잃고쇠퇴하게 된 것으로 보임.
그러나 20세기 초 애국계몽기 <신단공안> (작자가 이해조라는 설이 있음)에서 야담의 근대적 변용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음.
- <신단공안>: 1906년 5월~12월까지 <황성신문>에 연재된 7편의 한문현토체 소설. 7편 중 <김봉 본전>, <어복손전>이 야담과의 연결점을 보여줌.
<김봉 본전>은 봉이 김선달이 주인공으로,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조선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음. <어복손전>은 19세기 중엽 철종 때를 배경으로 노비와 상전의 갈등을 그림. 야담에서 주로 발견되는 서사이나, <어복손전>은 조선의 신분제에 대한 작자의 적개심이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애국계몽기적 문제의식을 보여줌.
->이 두 작품은 야담의 문체나 서사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야담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그러나 조선 사회를 대상으로 모순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주제의식이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음.
<신단공안>은 한문현토체 소설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한문소설보다 진일보했다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한문소설에 가까운 형태. 따라서 언어적으로 한계가 있다 할 수 있음.
이러한 한계를 깬 것이 <대한매일신보>에 1905년 연재된 작자미상_소경과 앉은뱅이 문답과 1906년 작자미상_거부오해. -> 두 작품은 풍자적 어투로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음. (<신단공안>과 달리 민족의식을 보여준다는 점네서 주제 의식에서 획기적인 진전을 취하고 있음.)
그러나 이 작품은 야담과 별 관련이 없고, 애국계몽기의 신흥 단형서사라는 점에서 문제가 됨. 야담은 애국계몽기 새로운 한글 단형 서사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임.
1910년 대한민보에 연재된 이해조의 신소설 <박정화>에 야담이 수용되어 있으나, 창작에 활용되었을 뿐이지 야담이 새로운 무엇이 되거나 만들어낸 것은 아님.
또, 같은 시기 <양은천미>라는 야담집이 성립되기도 했는데, 표기 문자는 여전히 한문. 이 책의 야담에는 흥미 위주의 통속적 필치가 두드러짐. (신분 갈등이 작위적으로 미봉되고 맘, 처첩 간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호도됨.)
저명한 사대부의 일화를 각색하거나 부연, 윤색한 이야기가 많으며, 시대적 배경이 조선 전기, 고려시대로 설정된 작품이 많음. -> 이 역시 통속적 지향과 관련이 있음.
즉, <양은천미>는 인식소가 약화되고 흥미소가 강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할 수 있음. 작품의 주제의식과 현실 반영력이 전성기의 야담과 비교해 크게 빈약해졌는데, 이는 ‘기록 서사’가 ‘구전 서사’로부터 멀어진 것이 큰 이유로 보임. 구전 서사가 빈약해지며 그 자리를 통속성과 작위성이 대신한 것.
<양은찬미>가 보여주는 이러한 경향성은 일제강점기의 대중화된 한글 야담과 연결됨.
일제강점기에는 윤백남이 1934년 10월 <월간야담>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이듬해 11월 김동인이 <야담>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며 명맥이 이어짐. 그러나 본래적 의미의 야담과는 멀어져 전성기 때의 생동감과 현실성을 잃어버린 ‘속화’된 장르가 되고 맘.
마무리[편집 | 원본 편집]
‘야담‘이라는 글쓰기가 성향했다는 것은 조선 후기 문학사의 특기할 부분. 17세기 전반~19세기 말까지 여러 야담집이 등장했으나, <청구야담>은 그중 최고의 야담집이라 할 수 있음.
문학사의 자취를 따라가면 <수이전>, <삼국유사>에서 연원하는 ‘구전‘의 뿌리를 가진 단형 서사문학이 <청구야담>으로 이어진 것.
<청구야담>의 서사는 대단이 풍성하고, 조선 후기를 살아간 인간들의 삶을 생생하면서도 총체적으로 보여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