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생사를 건 인정투쟁―이언진의 등장과 『호동거실』
괴물의 등장[편집 | 원본 편집]
이언진(1740-1766)은 18세기 중엽의 문인으로, 당시는 개성적인 문인들이 많았음.(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성대중 등) 이언진은 이들과 달리 중인 역관 출신. 이언진은 본인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글쓰기를 하였음. 시작(诗作)은 그에게 있어 미적 사유 행위였고, 소여(所與)로서의 신분 차별에 대한 항의와 부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 -> 즉, 이어진에게 ‘시작’이란 자신의 정체성 담보를 위한 생존의 행위였음.
이언진은 20대에 몇년간 시를 썼는데, 이런 점에서 그의 문학은 청년의 문학이라 할 수 있음. 그러나 그가 27년 살았고, 생의 마지막 몇년동안 병고에 시달리며 시작을 했다는 점에서 ‘말년의 문학’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함. -> 이언진의 문학은 청년과 말년의 문학을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이함.
이언진의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이언진은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음. 자는 우상이고, 호는 송목관, 호동(골목길).
20살(영조 35년) 때 역과에 합격하여 사역원 한학 주부(중국어 통역관)가 됨. 이언진은 일본에 가기 전 중국 연경에 두 번 다녀왔음. 24살(영조 39년)에 통신사를 따라 한학압물통사의 직임을 띄고 일본에 가게 됨.
- 압물: 사신을 수행해 일본에 선물할 물품을 맡아 관리하는 일
- 통사: 통역관
이 해(1763년)가 계미년이었기 때문에 ‘계미통신사’라고 불렸음. 계미통신사는 10월에 서울을 출발해 이듬해 6월에 귀국하였음.
*통신사의 구성
계미통신사의 구성 | 정사(正使) | 부사(副使) | 종사관(從事官) |
서기(성대중) | 서기(원중거) | 서기(김인겸) | |
제술관(남옥) -> 문장짓는 일을 총괄 |
3서기도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 중에 선발하지만 제술관은 특히 문재가 있는 사람 중에 선발되었음. -> 제술관과 3서기를 합쳐 4문사라 불렀는데, 이들은 일본 문인들을 상대해 시를 지어 국위를 선양하는 것이 임무였음.
4문사는 관례상 서얼이 맡았음. (양반들은 일본에 가는 일이 위험하다고 꺼렸기 때문)
이언진은 계미통신단에 속하였지만 역관으로 동행한 것이기 때문에 4문사와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음.
통신사절단이 탄 배는 1763년 10월 부산을 출발해 11월 후쿠오카 앞바다의 이키섬에 도착했음. 이언진은 이키섬에 머물며 장편 고시 <해람편(바다를 구경하다.)>을 짓는데, 운자(韻字)를 쓰고 있고, 96구나 되는 장시였기 때문에 4문사가 이 시를 보고 감탄하였음.
- 압운법 : 한자는 초·중·종성의 세 가지 소리로 갈라 초성을 '자모(字母)'라 하고, 중·종성을 합해서 운모(韻母)라 한다. 이 운모를 같은 계통의 글자로 맞추는 것을 '압운(押韻)'이라 하고 한 수의 시 안에서 압운된 글자를 '운자(韻字)'라 한다. 그런데 이 운자는 옛 운서에 따라 고음(古音)대로 쓰므로 현대음과 다른 것도 있다.
<해람편> 인용 본책 163~164.
=> 나함, 도홍경, 이마두 등의 언급을 통해 이언진이 중국의 고전은 물론 서학서까지 섭렵했음을 알 수 있음.
남옥은 <남관록>의 1763년 12월 1일 일기 중
“이언진이 <해람편> 및 고체시 몇 편을 보여 주었다. 학식이 해박하고 문체가 찬란하니 진실로 당세의 기이한 재주이다. (…)”
라고 서술하며 이언진의 재주를 칭찬했고,
원중거도 <승사록>에서 “이러한 재주를 가지고도 역관에 종사하다니 애석하다.”라고 평하며 이언진의 재능을 칭찬하였음.
이 이후로 4문사는 이언진을 일개 역관이 아닌 문인으로 보게 되었음. 4문사가 일로 바쁘거나 너무 많은 요청이 쇄도해 일본인의 시 요청을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이언진에게 일본인을 상대하게 하였음. -> 이때문에 일본에서 명성을 얻게 됨. 이후 귀국해서도 한양에서 이름이 회자되었음.
이언진은 귀국 후 <해람편>을 퇴고해 스승인 이용휴에게 보여주고 비평을 받음.
또 일본에 가기 전부터 쓰기 시작한 <호동거실>을 귀국 후 병중에도 계속 써 죽기 얼마 전에 퇴고하게 됨. 26살 때인 1765년에는 박지원에게 몇 차례 <해람편>과 <호동거실>의 일부 시를 보내 평가를 받았는데, 박지원은 이 시들을 몹시 혹평하였음. -> 이언진은 이 일로 매우 분노하고 낙담함.
죽기 1, 2년 전부터 팔에 마비가 오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시를 지어 읊곤 하였음. 그러면서도 자신이 평생에 걸쳐 쓴 글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는데, 이는 신분 차별이 심한 조선에서 자신의 글을 남겨봤자 누가 알아주겠는가 하는 절망감 때문이었음.
이언진이 마당에서 원고를 태우고 있을 때 아내 유씨가 타다 남은 원고를 수습한 덕분에 <호동거실>을 비롯한 약간의 글이 후세에 남을 수 있게 됨.
이언진의 집은 필동의 남산 자락, 골목길이 구불구불한 곳에 있었는데 자인 ‘호동’이 이 공간을 의미함. 죽기 얼마 전 서울 근교의 바다로 이주했고, 1766년 잠시 서울에 돌아왔다가 삼청동 어떤 사람의 집에서 사망하게 됨.
이언진 사후의 일들[편집 | 원본 편집]
이덕무는 성대중을 통해 이언진의 문학적 재능을 알게되었음. 이덕무는 이언진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서울에 떠도는 이언진에 대한 소문이나 성대중에게 얻어 들은 말 따위를 <이목구심서>에 기록해 놓았음.
“나는 우상의 얼굴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 대해 익히 말하고 자주 논하며, 또한 나의 잡기 중에 그의 시문을 옮겨 적어 둔다. 혹자가 이를 두고 내가 일 벌이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조금도 그만두지 않으련다.”
=> 이덕무가 이언진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몹시 아꼈음을 알 수 있음.
이덕무는 생전 이언진과 친분이 없었음에도 그 집에 찾아가 동생을 만나 생전의 일을 물어보기도 함. 이덕무나 성대중은 이언진의 신분이 낮았음에도 그의 뛰어난 재능을 존중하였음.
이용휴(이언진의 스승)은 이언진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몹시 아꼈음. 이언진이 사망하자 만시(挽诗)를 열 수나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음.
박지원은 이언진 사후에 <우상전>을 지어 그의 요절을 애석해 했고, 김조순은 <이언진전>을 짓기도 함.
이언진 사후 백여년이 되어 가는 철종 11년에 이상적, 김석준과 같은 후배 역관 시인들이 그를 기리며 중국에서 유고집 <송목관집>을 간행하였고, 이 유고집에 이상적이 쓴 <이우상선생전>이 실려있음. 이언진의 집안에서도 같은 해 유고집 <송목관신여고>를 간행하였음. 신여고는 타다 남은 원고라는 뜻.
‘호동’이라는 말[편집 | 원본 편집]
이언진이 쓴 시집 <호동거실>은 호동의 거실이라는 뜻. 호동은 하층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의 골목길, 거실은 거주하는 곳을 뜻함. 이언진은 흔히 쓰는 말인 ‘여항’이라는 말 대신 새롭고 잘 쓰지 않는 말인 ‘호동’을 사용하고 있음.
특이한 것은 ‘호동’을 자신의 호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이 깃들어 있는 결정으로 보임. -> 자신이 사는 공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 따라서 호동은 공간을 표상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신분을 표상하는 말.
계급성을 띄는 말을 호로 삼은 것은 공간과 자신을 일체시킨다는 자의식의 표현. 동시에 양반 사대부에 대한 대립의식의 자각적 표출이기도 함.
<호동거실>의 형식[편집 | 원본 편집]
<호동거실>의 형식은 굉장히 특이함.
1. 6언 절구
: 한시는 대개 5언, 7언을 중심으로 발전했음. 이를 ‘근체시(近体诗)’라고 함. 6언절구는 중국과 한국에서 오랜시간 창작되었지만 주로 ‘희작(戏作)’이고, 비중이 있는 형식은 아님.
이언진의 6언 절구 창작은 5, 7언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사대부들의 한시 창작 관습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자기만의 새로운 감수성과 사유를 담기 위한 전략적 판단. (6언시는 5, 7언시와 달리 형식적 구속이 적어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음.)
한국 문학사에서 6언시로 170수나 되는 연작을 창작한 시인은 이언진말고 없음.
2. 백화(百话)가 많이 구사됨.
: 한시는 문어이기 때문에 백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임.(백화를 사용하면 시격이 비천해진다고 생각하였음.) 그러나 이언진은 시의 이곳저곳에 백화를 사용하였음. 특히 <수호전>의 백화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를 통해 <수호전>을 좋아하였음을 알 수 있음.
이언진은 희곡 <서상기>도 좋아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속문학’으로 간주되는 작품들. -> 소설이나 희곡 등의 속문학(하층, 민간문학) 속 어휘를 자신의 시어로 구사한 것은 시정의 문학을 추구했음을 나타내는 것. 이언진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글쓰기를 했다고 보임.
즉, 사대부 문학을 대척점으로 두고 그와 다른 미학을 추구하고 구축하겠다는 태도와 의욕의 결과인 것.
<호동거실>의 세계[편집 | 원본 편집]
<호동거실>의 내용적 특징
1. 호동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
: 호동은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사는 공간. 시인은 서민들의 삶을 냉철히 직시하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음. -> 이러한 점에서 <호동거실>은 호동 거주 서민들의 ‘열전’으로서의 기능을 함.
2. 지배층 양반 사대부에 대한 비판과 야유
: 이언진은 비주류, 주변의 인간으로서 사대부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인물. 사대부는 무능해도 부귀하지만, 하층 신분은 유능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차단되는 조선의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를 가지고 있었음.
3. 시인 자신의 초상을 다양하게 그려냄.
: <호동거실>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초상은 슬프고 어두우며 고통스럽기도 함. 시인은 자기 서사를 통해 스스로를 응시하거나 위로함.
4.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 및 신분제에 대한 전면적 부정
: 이언진은 사회적 차별과 억압이 주자학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음. 그래서 주자학 대신 이단으로 취급되던 ‘양명학’을 긍정하였음. 양명학 중에서도 민중적 지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이탁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호동거실>에서는 여항의 모든 사람들을 ‘성현’이라고 함.
“길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 / 배고파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 양지와 양능을 지니고 있음을 / 맹자가 말했고 나 또한 말하네.”
=> ‘양지‘, ’양능‘은 인간이 본래 타고나는 도덕적 감정. 양명학에서는 이를 누구든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 성현이 될 수 있다고 여김.
=> 이언진은 주자학을 양명학으로 대체함으로써 신분제가 철폐된 평등한 세계를 꿈꾼 것이라고 할 수 있음.
5. 유불도 삼교를 인정함으로써 다원적 사고를 모색함.
: <호동거실>에서는 양명학(유교), 불교, 도교가 나란히 긍정되고 있음. -> 삼교의 공존과 회통을 통해 진리가 추구될 수 있다고 보았고, 삼교를 모두 진리로 인정함으로써 차별적 사회가 아닌 평등하고 다원적인 사회를 모색함.
-> 주자학 만이 배타적인 진리라는 사고를 부정하고 진리를 새롭게 구성한 것.
이러한 사고는 홍대용의 공관병수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어진은 ‘신분제의 철폐‘를 주장하기 위해 진리의 다원성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할 수 있음. (이어진의 진리의 다원성은 ’신분제‘의 이데올로기적 근거인 주자학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
<호동거실>은 밝은 정조와 어두운 정조가 공존하여 나타남. 밝은 정조는 골목길의 사람들을 읊을 때 주로 나타나고, 자신의 불우한 삶과 병고를 읊을 때는 어두운 정조가 나타남. -> 이언진은 호동의 서민들에게서 활기와 희망을 발견한 것으로 보임.
<호동거실> 중 노동하는 서민에 대한 부분
“기와 쌓고 토담을 쳤거늘 / 비가 와도 안 무너지겠네. / 저물어 집에 와 옷을 터나니 / 먼지 속에 하나의 도를 행했군.”
=> 하층민에게 ‘도를 행했다.‘라고 말한 부분이 특이함. (<호동거실>의 다른 시에서도 “도는 행상과 거간꾼에게 있다.”고 말하기도 함.) -> 이언진의 비사대부적 사고가 드러남.
(사대부인 박지원은 <예덕선생전>에서 엄향수를 고결한 인간을 찬미하지만 그의 노동을 도라고 여기지는 않았음. 박지원에게 도는 사대부의 것. 노동을 도로 여기는 이언진과는 대비되는 인식)
또한 <호동거실>은 고통에 대한 높은 감수성을 보여줌.
“관아에서 매 맞고 곤장 맞는 이 / 부모 형제와 같지 않은가. / 자기는 제 팔에 옴이 오르면 / 의원 불러 고약 달라 약 달라 하면서.”
=>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일체로 여기는 감수성이 드러남. 이는 생의 고통을 겪어 본 시인의 존재 여건과 관련되는 공감의식이라 할 수 있음.
박지원은 이언진의 시에 슬픔이 많다고 평했는데, 이언진의 시에는 슬픔뿐 아니라 다양한 자태와 면모가 나타남.
1. 풍자와 비판
:“원수는 천 명, 지기는 하나 / 사람 아니라 모두 동물에 있지 / 열전 지어 물고기와 새 찬미하고 / 하늘에 제 올려 교룡과 이 저주하노라.“
-> ‘원수‘는 지배층에 속한 사람, ’지기‘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용휴)를 말함. 제2수에서 모두 동물에 있다하는 것은 방어막으로 여겨지고, 제3수에서 ’열전‘을 말하는 것은 <호동거실>의 성격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것.
시의 ‘물고기‘, ’새‘는 호동의 하층민들을 말하고, 교룡은 군주, 이는 관리를 의미함. -> 다양한 은유를 쓰고 있는 것은 조선의 지배구조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 수탈 구조를 비판하며 하층민을 옹호하고 있는 것. 즉, 이언진의 저항적 자세를 보여주는 것.
2. 해학
: <호동거실>은 유쾌하거나 장난스러운 어조가 나타남. 해학은 하나의 미학적 태도. 이언진은 시 쓰는 것을 ‘유희’로 생각했는데, <호동거실>에서 발견되는 해학성은 이러한 문학적 입장과 관련이 있음. -> 이언진에게 유희란 차별받고 소외된 자가 온갖 금기를 깨부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
이언진은 <호동거실>에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주목되는 것은 시인이 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 ‘나’와 사회적 약자들을 일체화. 따라서 <호동거실>은 시인과 하층민의 강한 연대를 보여주게 됨.
이러한 집단적 연대감 위에서 당대 지배층과 주류 사회가 비판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체제와 이념이 근본부터 부정되고 있는 것. -> 어떠한 경계도 인정하지 않는 혁명적이고 래디컬한 글쓰기. 조선시대 문학을 통틀어 <호동거실>에만 존재함.
이언진은 <호동거실>에서 자신을 ‘골목길 부처’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골목길의 그 누구도 부처일 수 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음. 골목길에 사는 비천한 인간도 모두 양지를 가진 똑같은 인간이므로 차별해서는 안된다. -> 즉, 인간의 평등성과 주체성을 선언한 말.
* 스승 이용휴[편집 | 원본 편집]
이용휴는 남인계 문인으로 성호 이익의 조카. 18세기 남인을 대표하는 거물급 문인. 정약용은 이용휴에 대해 ‘포의 신분이지만 30년 동안 조선의 문단을 좌지우지했다.’고 평하기도 함.
이언진은 자부심이 높아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았지만 스승에게는 각별한 존경의 뜻을 표했음. 두 사람은 사제로서 그 존재관련이 깊고 각별한 사이였음.
이용휴는 문학에서 독창성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양명학 좌파인 이탁오의 사상을 수용하였음. 또한 서얼이나 불우한 중인층 문인들을 각별히 여기기도 함. -> 이언진은 이러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주체성과 인간의 사회적 평등성에 대한 자각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임.
인정투쟁[편집 | 원본 편집]
이언진은 강한 자의식, 높은 자존감을 가졌으며 <호동거실>에는 시인의 주체성이 강하게 강조되어 있음. 이언진의 높은 전투적 주체성과 저항의식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 -> 이언진에게 저항은 높은 주체성(我慢)에 의해 가능하며 아만이 저항의 원동력이기 때문임. 이러한 전투적 주체성은 ‘인정투쟁’과 긴밀한 연관을 맺음.
- 인정투쟁: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역설이 존재함을 헤겔이 발견했다. 주인은 자신의 자아상을 확립하고자 타인(노예) 위에 군림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역동적인 관계에서 진정으로 자의식을 가진 것은 노예가 된다. 주인의 자아상은 노예가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이 주인의 자아상을 가지는 것은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주인은 노예를 자기와 동등하게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주인은 진정한 자아상에 도달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노예는 주인을 인정하는데, 주인이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인과 노예는 진정한 자아상에 도달할 수가 없게 된다. 헤겔이 볼 때 진정으로 자의식을 성취한 사람은 노예이다. 노예는 복종과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주인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 의식의 미덕이다.
“콧구멍 쳐들고 주인 뒤를 졸졸 따르니 / 종이라 불리고 하인이라 불리지 / 천한 이름 뒤집어쓰고도 고치려 않으니 / 정말 노예군 정말 노예야.“
=> 노예는 사회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노예가 아니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부정하고, 주인(사회 체제)과의 투쟁을 해야만 한다는 이언진의 사유가 담긴 시.
“추한 종놈 온다! 추한 종놈 온다! / 아이들 짱돌 줍고 흙을 던지네 / 내 들으니 참 괴이한 일도 있지 / 길에 떨어진 칼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다니.”
=> 이 시에서 ‘칼’은 중요한 메타포. ‘주인’의 입장에서는 지배의 도구, 노예의 입장에서는 반역과 항거의 도구가 됨. 즉, 지배와 피지배 간의 첨예한 양상을 드러내는 상징. 이언진은 이 시에서 노예가 칼을 들고 주인에게 반역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음.
“이따거가 쌍도끼를 / 장난삼아 놀린 건 큰 잘못 / 손에 따로 박도(무기용 칼)를 들고 /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하였지.”
=> ‘이따거’는 흑선풍 이규(수호지 등장인물)를 가리킴. 양산박 108도적 중 가장 잔인한 인물임. 시인은 이규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표하고 있는데, 그가 <수호지>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지배권력에 저항적인 인물이었기 때문. 즉, 이언진의 저항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
이언진이 보여주는 전투적 주체성은 인정투쟁을 위해 불가피하게 요청될 수 밖에 없던 것으로 보임. 그리고 이 점에서 <호동거실>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보여주게 됨. 그리고 이 ‘새로운 주체’는 기존 체계에 대한 부정, 새로운 진리 체계의 구성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음.
말년의 문학으로서의 면모[편집 | 원본 편집]
<호동거실>은 시인의 청년기 문학이자 말년기 문학임. 전투적이거나 비판적인 시인의 시는 내면성이 빈약하거나 존재론적 성찰이 결여된 경우가 많지만, 이언진의 시는 그렇지 않음. -> 자기 응시,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 고통에 대한 관조 등을 담고 있어 내면성이 깊음. 이점에서 말년기 문학으로서의 면모가 짙게 나타남.
이언진과 박지원[편집 | 원본 편집]
이언진과 박지원은 동시대 사람. 박지원이 3살 정도 많음. 이언진은 죽기 1년 전 박지원에게 자신의 시 일부를 보냈었는데, 박지원은 이에 대해 혹평을 하였음. 얼마 후 이언진이 사망하였고 박지원은 그의 전기인 <우상전>을 썼음. 이 전으로 이언진은 사후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음.
- <우상전>: 이언진이 일본에 가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일을 서술함. 이언진의 시 작품을 여럿 소개하고 있음.
박지원은 <우상전>을 통해 이언진의 천재성을 부각하고, 그가 신분적 한계로 인해 불우하였고, 이 때문에 시에 슬픔이 많다고 하였음.
<우상전>은 이언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하였지만, 여러 아쉬운 점이 있음.
1. ‘시선’의 문제
: 이언진을 아랫사람처럼 서술하고 있음. (신분적 편견이 작용함.)
2. 이언진의 내면을 포착하지 못함.
: 그의 천재성만을 부각할 뿐, 그의 내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알려고 하지 않음.
=> <우상전>은 피상적이게 서술되어 이면의 진실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음.
박지원은 ‘사대부’로서의 존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언진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것으로 보임. -> 즉, 이언진의 문학적 실천, 그리고 미적, 사상적 지향은 박지원의 사고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
박지원의 법고창신은 체제 유지를 근본으로 두고 있고, ‘창신’보다는 ‘법고’에 더 큰 비중을 두었음. (박제가에게 보낸 편지) 그러나 이언진은 법고를 바탕으로 하되, ‘창신’의 가능성을 크게 열어두었기 때문에 박지원이 그의 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
이언진, 조선 후기 문학사의 대사건[편집 | 원본 편집]
<호동거실>은 고통, 사랑, 분노, 항거의 언어로 채워져 있음. 이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짐.
사대부 문학을 하나의 ‘동일자’로 파악한다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은 각각의 개성을 나타내지만 ‘동일자(同一者)’에 포함된다 할 수 있음. 홍세태, 조수삼 같은 중인층 문인은 ‘아동일자(亞同一者)’에 포함될 것.
아동일자(亞同一者): 동일자와의 차이를 느끼지만, 동일자에 수렴되거나 동화되는 경향이 있음.
이언진은 동일자도, 아동일자도 아니며, ‘非同一者’라는 것이 주목됨. 한문학의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난 비동일자인 것. 이 점에서 문학사적 문제성을 가짐. -> 자기 의식을 가지고 생사를 건 인정투쟁을 하며 ‘동일자’에게 맞서고 대립함.
이언진은 조선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대립자’라고 할 수 있음. (대립은 다양한 문인들에게서도 나타났지만, 본격적인 대립자로서의 면모는 이원진이 최초.) -> 이를 통해 조선은 서로 대립적인 두 개의 자기의식에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었고, 이를 지양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됨.
<호동거실>이 보여주는 탈 신분주의, 탈권위주의, 탈획일주의, 자유.평등에 대한 지향, 주체에 대한 강한 긍정,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옹호는 근대적 지향을 갖는다고 하기에 충분함.
이언진은 차별, 고통을 딛고 그만의 감수성으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였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어떤 문인도 이룩하지 못한 미학을 창조할 수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