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조선 전기 문학을 보는 시각 - 훈구파와 사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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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의 두 문인, 정도전과 권근[편집 | 원본 편집]

고려 말 신흥사대부는 온건파(이색, 정몽주 등) / 강경파(정도전, 조준 등)로 나뉘었음. 강경파와 무인 세력인 이성계과 손잡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승리를 거둠.

조선 건국 초의 문인으로는 삼봉 정도전, 양촌 권근 두 사람이 주목됨.

-정도전[편집 | 원본 편집]

정도전은 고려 공민왕 때 급제했으며, 이색의 문생. 조선 태조 3년(1394년) <조선경국전>이라는 법전을 저술하여 조선 통치 체제의 근간을 설계하였음. (이후 이 책을 기반으로 하여 성종 때 <경국대전(조선의 기본 법전, 조선이 망할 때까지 통용됨.)>이 편찬되었음.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저술한 지 1년 뒤에 <경제문감>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재상, 대관, 간관, 감사, 수령, 무관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조선의 통치 조직과 통치 이념의 개요를 제시하였음.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은 정도전이 조선의 건국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제도적 기초를 마련했음을 보여줌.

정도전은 조선 왕조의 이념을 정초하기도 하였음.

<심기리> 3편은 <조선경국전>과 같은 해에 집필되었는데,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고 유교를 옹호하고 있음. 心은 불교를, 气는 도가를, 理는 유교를 표상하며, 이치를 강조하는 유교만이 진리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침. 정도전의 사상전 동지인 권근이 주석을 붙였음.

<불씨잡변>은 태조 7년(1398)에 집필되었는데, 정도전이 이해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어 알려지지 못하다가, 이후 유고가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짐.

<불씨잡변>에서는 성리학의 이기론에 근거한 체계적인 논리로 불교의 교리와 폐해를 비판하고 있음. 불교의 인과설, 윤회설, 화복설의 잘못을 비판한 뒤, 이후 역사적으로 불교가 국가에 끼친 폐혜를 지적함. -> 유교 국가 조선의 사상적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지어졌다 할 수 있음. ‘숭유억불’의 이론적 기초.

정도전의 문학관

“(…) 하늘의 문은 기로써 되고 땅의 문은 형으로써 되지만 사람의 문은 도로써 되는 까닭에 ‘문은 도를 싣는 그릇이다’라고 하니, 이는 사람의 문을 말한다. 그 도를 얻는 다면 시서예악의 가르침이 천하에 밝아 해와 달과 별이 순조롭게 행하고 만물이 골고루 다스려지니, 문의 성대함이 이에 이르러 지극하다. (…)” - 정도전이 쓴 이승인의 문집 서문

ㅡ> 정도전은 ‘재도론(문학은 도를 실어야 한다)’를 펼치고 있음. 이때의 도는 ‘유교의 도’를 말함. 정도전은 재도한 문학은 하늘의 운행을 돕고 만물이 잘 다스려지게 하는 공용이 있다고 하고 있음. 즉 문학의 역할이 막중하다는 것. 따라서 문학을 담당하는 사람인 선비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음.

-권근[편집 | 원본 편집]

권근은 이제현의 장인인 권부의 증손이고, 서거정의 외조부임. 조선 왕조 최초의 대제학이었고, 서거정도 대체학 벼슬을 하였음. 따라서 조선 초 권근의 집안은 문학적으로 큰 성세가 있었다 할 수 있음.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공민왕 때 급제했으며, 이색의 문생임. 조선 개국 후에는 하륜과 함께 <동국사략>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하였음.

  • 하륜: 하륜은 조선전기 영의정부사, 좌정승,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47년(충목왕 3)에 태어나 1416년(태종 16)에 사망했다. 고려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한 인물로,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다 유배당했다. 새 왕조의 도읍을 계룡산으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명나라와의 표전문 시비 때 명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낼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명에 들어가 납득시키고 돌아왔다. 정도전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하여 태종의 총애와 비호를 받았다. 인품이 중후·침착·대범했다고 한다.

또한 <입학도설>, <오경천견록>이라는 성리학적 저술을 하기도 했음.

<입학도설>: 성리학의 원리를 도식으로 밝힌 책. 조선시대 문인들은 성리학의 원리를 도설로 설명하곤 했는데, 이 책이 효시임. 후대 이황의 <성학십도>와도 연결됨.

<오경천견록>: 1405년에 완성되었고 현전하는 우리나라 경학서 중 가장 오래됨. 5경에 대한 주석서.

=>정도전과 권근에 의해 고려 말의 사대부 문학이 조선으로 이월되게 됨.

훈구파/사림파라는 용어[편집 | 원본 편집]

세조 이래 성종과 중종 때까지 몇 차례의 정변이 있었고, 그 때마다 많은 공신이 책봉되었음. 공신에게는 공신전과 함께 많은 노비가 하사되었음. 이들을 중심으로 집권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훈구파라고 부름.

훈구라는 단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빈번히 나오는 단어로 대대로 훈공이 있는 신하는 일컫는 말. 훈구대신이나 훈구중신처럼 결합해서 사용하기도 함. 본래 긍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단어.

사림은 <태조실록>에서 보이는데, 원래 선비 집단을 의미함. 조선 초에는 대체로 조정의 선비를 가리키다가 성종 때 재야의 선비(성리학적 도덕을 중시하는 지방 선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바뀜.

ㅡ> 훈구나 사림은 예전부터 써오던 말이지만, ‘훈구파’, ‘사림파’는 국사학자 이병도가 1956년 처음 썼음. 근대에 만들어진 용어.

사림파는 김종직이 선산 부사로 있다가 서울의 관직으로 복귀한 성종 13년(1482) 이후에 성립된 세력을 이름. 김종적이 영수이고, 그의 문생 / 그를 지지하는 부류들로 이루어짐.

김종직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였음. 부친은 김숙자인데, 길재의 제자. 길재는 정몽주에게 수학하였고, 고려가 망할 기미가 보이자 고향 선산으로 낙향. 16세기 사림에서 ‘도통(道统)’이라는 개념이 나타나는데, 이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다고 보았음. 성리학의 도맥이 하나의 계보로 쭉 이어진다는 개념.

김종직 밑에서 훌륭한 문생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문학으로는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등이 있고, 도학으로는 김굉필, 정여창 등이 있음. -> 이들은 대개 영남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들 무리를 ‘경상도 선배의 무리’라고 조롱하기도 하였음.

“김종직은 경상도 사람이다. (…) 그러므로 경상도의 선비로서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들이 종장으로 높여 스승은 제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는 제 스승을 칭찬하는 것이 사실보다 지나쳤는데, (…) 당시 사람들이 이를 조롱해 ‘경상도 선배의 무리’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5년 8월 6일 기사 사관의 논평

훈구파의 문학[편집 | 원본 편집]

훈구파에 속하는 주요 문인으로는 이석형, 신숙주, 서거정, 강희안.강희맹 형제, 성임.성간.성현 형제, 채수 등이 있음. 이들은 주로 세종, 세조, 성종 연안에 활동함.

성종 10년에 간행된 <한도십영(한양을 노래한 10개의 노래)>라는 시집은 10개의 시제에 대해 9명의 문인이 각 10편씩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음. 이들은 대개 훈구파에 해당하며, 이 시에는 훈구파가 이룩한 조선 초의 문화적 성세를 자랑스러워 하며 이를 구가하는 심회가 잘 표출되어 있음.

-이석형[편집 | 원본 편집]

이석형은 성종 때 공신에 책봉된 인물로, <호야가>라는 애민시를 남김. 호야는 인부들이 일을 할 때 서로 ‘어허야 어허야’ 하면서 맞추는 소리임. 이 시는 궁궐을 짓느라 각지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삼각산의 돌과 백운대의 나무를 채취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고발한 시.

(시 20쪽 확인)

-신숙주[편집 | 원본 편집]

신숙주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해동제국기>라는 책을 편찬함. 일본의 지도가 여럿 실려 있고, 역대 천황이 간략히 언급되어 있으며, 일본의 풍속과 지리가 소개되어 있음. 서문에서 신숙주는 일본과의 우호를 강조하기도 함.

<해동제국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에 대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주목됨. 이후 일본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조선 후기의 문인들은 이 책을 중요한 참고서적으로 삼았음. Ex) 18세기 후반 원중거의 <화국지>, 이덕무의 <청령국지>. <해동제국기>를 참고하여 저술됨.

조선 후기에는 초보적이지만 일본학 연구가 성립되게 되는데, <해동제국기>는 그 밑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음.

-서거정[편집 | 원본 편집]

서거정은 오랜 시간 대제학을 하면서 세조, 성종 연간에 ‘문학 권력’을 쥐고 있었음. 스스로도 “30여 년간 사문의 맹주”였다고 말하고 있음.

서거정은 특히 시에 능했는데, 시풍이 ‘부려’하다는 평을 받음. 서거정은 평생 부귀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부려한 시를 썼던 것.

조선 초에는 국가적인 편찬 사업이 대대로 이루어졌는데, 서거정은 이 때 큰 기여를 함. <경국대전>의 편찬을 위시로, <삼국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동국통감> 등의 편찬에 큰 역할을 함.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동문선>에는 그가 쓴 서문이 실려있기도 함.

->이들 서적은 이 시기 조선 문화의 융성함을 잘 보여줌

<태평한화골계전(태평한 시대의 한가로운 이야기와 웃기는 이야기)>이라는 소화 채록집을 쓰기도 함. 조야의 사대부들에게서 들은 소화를 채록하였음. 우리 문학사 상 최초의 소화집에 해당.

이외에도 <필원잡기>, <동인시화>라는 책도 집필함. <필원잡기>는 이제현의 <역옹패설>을 잇는 필기류에 해당하는 책이고, <동인시화>는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을 잇는 시화집에 해당함. 다만 좀 더 본격적인 시화집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파한집, 보한집과 차이가 있음,

-강희안[편집 | 원본 편집]

강희안.강희맹 형제는 세조 즉위 때 공신으로 책봉되었음.

강희안은 시, 그림, 글씨에 모두 능한 ‘시서화 삼절’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임. 현전하는 문인화 <고사관수도>는 수묵화로, 높은 격조를 보여주어 강희안의 정신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게 함. 또 원예에 취미가 있어 <양화소록(꽃 기르는 것에 대한 작은 기록)>이라는 책을 남기기도 함. 이러한 책은 전에 없던 책으로, 강희안이 새롭게 창안한 것에 해당됨.

<양화소록>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인 17-18세기 허목의 <석록초목지>, 이만부의 <노곡초목지>, 유박의 <화암수록>과 같은 원예서들이 나왔음. <노곡초목지>, <화암수록>은 <양화소록>의 영향을 받음.

이외에도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도 <양화소록>에 대한 언급이 보임.

-강희맹[편집 | 원본 편집]

강희맹은 <촌담해이(시골 이야기에 웃는다)>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농촌에 전하는 소화를 기록한 책. <태평한화골계전>이 조정과 재야의 사대부들에게서 들은 소화를 기록했다면, <촌담해이>는 농촌에 거주하는 농민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채록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

<금양잡록>이라는 농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는데, 강희맹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금양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집필한 농서라는 점에서 주목됨. 보통의 농서는 중국의 문헌을 참조해 편찬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

<금양잡록>에서 곡물 이름을 적을 때 먼저 이두 표시를 하고 이어서 한글 표기를 했다는 점이 특별함. 이러한 기술 방식은 후대의 농서 ex) 박지원의 <과농소초> 에도 영향을 끼쳤음.

<금양잡록> 속 <농담>, <농자대>라는 글이 실려 있는 것도 주목할만함. <농담>은 농부와 농사일에 대해 주고받은 말을 기록한 글이고, <농자대>는 벼슬을 하는 것도 마뜩잖으니 농사나 지을까 한다는 ‘나’의 말애 대한 농부의 대답을 기록한 글임. <농구(농민의 노래)> 14수가 실려있기도 함. 농구는 농요를 한시화한 것. -> 한시로 번역하면서 꾸미거나 다듬기보다는 그대로 번역한 느낌이 듦.

-성임[편집 | 원본 편집]

성임은 계유정난 때 공신에 책봉됨. 동생인 성현과 성간은 공신에 책봉된 적은 없지만, 훈구 집안 인물이기 때문에 훈구파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

성임은 송나라 <태평광기>를 본따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 실린 이야기들을 수집해 <태평통재>라는 책을 편찬하였음. 전체가 80책, 240권 이상의 거질로 추정되지만, 현전하는 분량은 2책 5권에 불과함.

<태평통재>는 수록된 작품 끝에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음. 우리나라의 책으로는 <신라수이전>, <고려사>, <삼국유사>가 있음. <신라수이전>은 박인량의 <증보수이전>으로 보임.

중국 문헌으로는 동진 때의 <수신기>, 송 초의 <태평광기> 등이 있고, 원말 구우의 전기소설집 <전등신화>, 명초 조필의 전기소설집 <효빈집>, 이정의 <전등여화>, 소화집인 <소해총주>등이 있음.

ㅡ> <태평총화>는 당시 최신 중국 서적까지 검토해서 넣은 야심찬 기획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음. 이 책을 통해 당시 우리나라 사대부들의 동아시아 서사문학에 대한 이해 수준을 추측할 수 있음.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대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창작할 수 있었으리라 보임.

-성간[편집 | 원본 편집]

성간은 자전인 <용부전>을 남겨 주목됨. 용부란 가난한 사내인데, 작자 본인을 가리킴. ‘게으름’의 가치를 부각하며 맹목적인 부지런함을 비판하고 있음.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몸과 마음이 다 피곤하다오. 낮에는 바쁘게 일을 해 아침에서 저녁까지 분주하게 계속 무엇을 하고, 밤에는 푹 잠들지 못해 잠꼬대를 하다가 깨어나니, 부지런함을 대체 어디다 쓰겠소?”

ㅡ> 부지런한 미덕을 중시하는 근수자가 설교하자 용부가 그에 대답한 말임.

이 작품은 명리를 부지런히 좇는 사람이 조롱되고 있음. 이를 통해 이 작품이 권귀화되고 있던 당시 훈구 세력의 탐욕 추구를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이 점에서 용부의 말은 훈구파 내부에서 제기된 자기반성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음

성간은 고려말에 성행하였던 애민적 기속악부 창작의 전통을 계승해 <노인행>이나 <악풍행> 같은 기속악부를 여러 편 창작하였음. 제목의 ‘행’은 시 체의 하나를 일컫는 것.

<노인행>: 노인을 노래하다는 뜻. 당시의 과중한 군역으로 인한 문제를 한 노인의 삶을 통해 고발하고 있음.

<악풍행>: 모진 바람을 노래하다라는 뜻.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농민에 대한 깊은 애정이 표현됨.

“백성이 굶주림을 면할 수만 있다면 / 나는 굶주려도 좋겠네 / 아아! 나는 굶주려도 좋겠네/”

->이를 통해 작가가 농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성간은 단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가 됨. 그러나 급제한 해에 계유정난이 일어나게됨. <용부전>에 “용부는 머리도 빗지 않는다”는 대목이 나타나있는데, 자고 일어나 머리도 빗지 않고 멍하니 있어 나무로 만든 인형 같았다. 그래서 집안 사람들이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는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내용이 나옴. -> 이 부분은 계유정난으로 인한 성간의 정신적 충격을 서술해 놓은 부분이 아닌가? 싶음~

그리고 3년 뒤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하고, 이들의 근거지였던 집현전이 철거되게 됨. 이때 성간은 세조의 명령을 받아 <하주반신전(반란을 일으킨 신하를 처형한 것을 축하하는 글)>을 올림. 그리고 그 해 7월에 병으로 사망하게 됨. 성간은 일련의 정치적 변고를 겪으며 내적인 번뇌가 심해져 죽은 것으로 추정됨.

성간은 훈구파 내부의 문제적 인물로서 그 내적 분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함. 따라서 <용부전>은 사회적.역사적 배경, 정치적 배경에 유의해 읽을 필요가 있는 작품. (성간의 내면이 투사되어 잇기 때문에)

-성현[편집 | 원본 편집]

성현의 호는 용재 / 허백당임. 용재의 ‘용’은 <용부전>의 ‘용’자와 같아서, 성간과 성현이 게으름이라는 가치 태도를 공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됨. -> 훈구파라고 해서 모두 권귀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을 통해 알 수 있음.

허백당의 ‘허백‘은 <장자>에서 유래한 말로, ’욕심을 비우면 마음이 허백하게 된다, 즉 텅 비어 빈방처럼 된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 ’용‘도, ’허백‘도 모두 <장자>와 관련된 것으로, 성현의 가치의식을 본다면 도가적 지향이라 할 수 있음.

성현도 애민적 기속악부를 창작하였음.

<예맥행>: 보리베기를 노래하다라는 뜻으로 노동하는 농민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그려내고 있음.

<벌목행>: 벌목을 노래하다라는 시로, 관의 명령으로 산촌에서 벌목하며 고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노래함.

음악에 조예가 깊어 <악학궤범>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음. 이 책에는 고려속요가 여러 편 실려있음.

성현의 대표 저서는 <용재총화>, 용재가 저술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본국의 민간 풍속, 설화, 문물제도, 학술, 문학, 역사, 지리, 종교, 음악, 서화 등에 대한 기록이 폭넓게 담겨있음.

이 중 문학적으로 주목되는 점은

1.      사대부 일화가 풍부하게 담겨있음.

: 대체로 상층 문학에 속함. (사대부들 끼리의 이야기이기 때문)

2.      소화나 설화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다채롭게 실어놓음

: 대체로 하층 문학에 속함

ㅡ> <용재총화>는 상하층 문학을 포괄하고 있다 할 수 있음.

<용재총화>는 형식적으로 본다면 필기와 패설의 복합체라 할 수 있음. 필기패설서에 해당하고 15세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를 대표하며 그 중 최고의 성취라 할 수 있음.

-채수[편집 | 원본 편집]

채수는 중종반정의 공신임. 성현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촌중비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시골의 비루한 말이라는 뜻임. 성현이 이 책의 서문을 썼음.

“내 친구 채기지가 벼슬에서 물어나 한가롭게 지낼 때 평소 들었던 것과 동료들과 나눈 농담을. 비록 말이 저속할지라도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촌중비어>가 채수가 벼슬에서 물어나 한가롭게 지낼 때 지은 패설집임을 알 수 있음

채수는 중종 6년 <설공찬전>이라는 소설을 짓기도 하였음. 애초에 한문으로 창작되었지만 한글로 번역되어 경향에 널리 유포되었음. 사헌부의 대간이 이 소설이 풍속을 문란케한다며 채수를 탄핵하는 바람에 작품이 모두 불태워지게 됨. 일종의 필화 사건.

이러한 필화가 일어난 이유는 중종 반정 이후 공신 <-> 비공신 간의 세력 다툼이 존재했고, 연산군 때 주춤했던 사림파들의 정계 진출이 중종반정을 기점으로 재개되었기 때문임. 또한 반정의 명분으로 풍속 교화가 강조되었음.

ㅡ>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사림파가 소설을 문제 삼아 훈구파인 채수를 공격한 것으 이해할 수 있음. 채수는 이 사건으로 벼슬에서 물러남.

  • 설공찬전: 「설공찬전」은 1511년(중종 6) 무렵 채수(蔡壽)가 지은 고전 소설이다. 본래 한문으로 쓰였고 한글로 번역되어 크게 유행했다. 현재 한문본은 전하지 않으며, 국문본은 설공찬의 영혼이 사촌 형제 설공침의 몸에 빙의하여,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다가 저승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까지만 전하고 있다. 당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불교 윤회, 지옥, 무속적 내용인 귀신 빙의 등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애초에 한글로 창작되지는 않았으나, 한글로 표기된 최초 소설이라는 점에서 소설사적 의의가 크다.

사림파의 문학[편집 | 원본 편집]

사림파는 성종 떄 지배층 내에 하나의 분파를 형성하는데, 지도자는 김종직이었음. 김종직은 문생을 많이 배출했는데, 문학을 전공한 유호인, 남효온, 조위, 김일손 등이 있고, 도학을 전공한 정여창, 김굉필 등이 있음.


-김종직

김종직은 밀양 출신으로 본관은 선산임.

-유호인

-남효온

-조위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

허균의 김종직 비판[편집 | 원본 편집]

선조 때가 되면 사림파가 정계의 주류가 되게 됨. 하지만 선조, 광해군 연간 때의 허균은 <김종직론>이라는 글을 써서 김종직의 위선적 면모를 공격함,

허균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자신의 생각을 눈치보지 않고 말하는 성격임. 이 글 역시 세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으로 보임.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김종직은 위선자다. 겉으로 좋은 말을 하고 대의를 말했지만, 실제로는 이익이나 챙긴 표리부동한 인간이다. <조의제문>을 쓴 것도 잘못되었다. 자신이 세조 때 벼슬을 안 했다면 상과없지만, 벼슬도 하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문제다. 뒤로 몰래 자신이 섬긴 임금을 이렇게 비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ㅡ> 신랄하게 김종직의 행적을 비판하고 있음.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올려 대유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ㅡ> 김종직의 명성만이 아니라 형적을 잘 보라고 말하고 있음.

훈구파와 사림파의 문학론[편집 | 원본 편집]

훈구파 중 이론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성현이고, 사림파에서는 김종직임. 이 둘은 훈구파/사림파의 글쓰기를 정당화하는 문학론을 전개하였음.

-김종직의 문학론[편집 | 원본 편집]

“(…) 문장이라는 것은 경술에서 나오니, 경술은 바로 문장의 뿌리다. (…)“ – 윤상의 시집에 써준 시문 (전문 50쪽)

ㅡ> 이 글에는 도본문말(도가 근본이고 문은 말단이다)라는 문학관이 피력되어 있음. 도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덕주의적 문학론이라고도 할 수 있음. 그러나 김종직은 경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도학자’가 아닌 문학가였음. 그래서 후대의 이황과 같은 도학자는 ‘김종직이 평생 한 일은 문학일 뿐이다.’라는 평가절하를 하기도 함.

-성현의 문학론[편집 | 원본 편집]

성현은 김종직의 문학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음.

“문장을 정원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나무의 가지와 줄기와 잎과 꽃이 번성해야 그 뿌리가 비호되어 나무가 크게 잘 자라는 것과 같고 (…) 이제 가지와 잎을 쳐 없애고서 나무가 무성해지를 바라고 (…)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 <허백당집> 문변 (원문 52쪽)

김종직이 뿌리를 중시한 것과 달리 가지와 잎이 무성하면 뿌리도 자연히 튼튼해진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음. 김종직이 도학 우선주의적 입장이었다면, 성현은 문학 우선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

“(…) 그러나 김계온은 번화한 글을 싫어해 단지 온후한 글만 취했으니, 비록 규범에 뜻을 두긴 했으나 메마르고 기세가 없어 볼만한 것이 못된다. (…)“ - <용재총화> (52쪽)

ㅡ> 계온은 김종직의 자임. 성현은 이 글에서 김종직의 문학에 대한 편협한 시선을 비판하고 있음. 문학은 다양한데, 김종직은 오로지 특정한 성향의 문학만을 옹호했다고 불만을 나타냄.

하지만 성현도 김종직과 같이 ‘도본문말’을 긍정하였음. 문제는 도와 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는 것임. 김종직은 도를 열심히 공부하면 문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성현은 문은 문대로의 자율성을 가지기 때문에, 도 뿐만 아니라 문 역시 공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졌음.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현은 도덕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양한 문학을 긍정할 수 있었음.

ㅡ> 두 사람 모두 재도론적 문학론의 틀 속에 존재하지만, 김종직은 엄격한 관철을, 성현은 느슨한 관철을 주장함. 김종직은 이념과 명분에 가까웠고, 성현은 현실과 실제에 가까웠기 때문에 비교적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자신의 문학에 반영할 수 있었음. <용재총화> 속에는 인간의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이러한 다면적 면모가 모두 반영되어 있음.

훈구파 문학은 보수적이고 사림파 문학은 진보적인가[편집 | 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