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강 국문시가와 우리말 표현의 경계 - 정철, 박인로, 윤선도의 시조와 가사
제14강 국문시가와 우리말 표현의 경계 - 정철, 박인로, 윤선도의 시조와 가사[편집 | 원본 편집]
조선이 건국된 지 50여년 후 훈민정음이 창제됨으로써 우리 문학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됨. 이전에는 차자 표기법을 사용했으나, 사용법에 제약이 많고 궁색하였음. 고려시대로 들어와서는 향찰표기가 쇠퇴하고 한자, 한문 표기가 주가 되었음. 이로 인해 토풍이 위축되고 화풍이 강해짐.
세종 때 우리말을 표기하는 독자적 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문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고, 우리 문학사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음.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편집 | 원본 편집]
훈민정음은 세종 28년인 1446년 반포되었음. 훈민정음 창제의 실무자들은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이개 등 집현전 학자들이었지만, 총 지휘자는 세종이었음.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히고 있는데, (선언문 126쪽) 여기서는
1. 자국 언어에 대한 자각(우리말과 중국말은 서로 다름.)
2. 백성에 대한 고려(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은 자신의 생각을 적을 수 없음.)
가 주목됨. 언어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애민 의식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음.
최만리는 세종의 국문 창제에 극렬한 반대를 보였는데,
“(…) 언문을 만들면 보거나 듣는 이들이 해괴하게 여길 것입니다. (…) 오직 몽골, 서하, 여진, 일본에 각각 문자가 있으나, 이는 이적(夷狄)이나 하는 짓이니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최만리의 이런 말은 개인의 견해만은 아니며, 당시 한문으로 글을 쓰던 문인, 지식인 층을 위시한 지배층의 일반적인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고 여겨짐. 주목되는 점은 훈민정음 창제를 ‘사대’를 거스르는 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임. 이를 통해 훈민정음 창제가 단순히 어문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이념적, 문명론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 서하: 11세기 전기~13세기 전기 사이에 중국 서북부의 오르도스와 감숙성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 칭기즈칸의 군대에 의해 멸망당하였음. 서하의 초대 황제 경종이 한자를 본떠 서하 문자를 창제하였음.
- 몽골: 13세기 초에 칭기즈칸의 명으로 만들어짐. 위구르 문자를 모체로 하는 표음문자. 한편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라마승 파스파에게 명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해 1269년 티베트 문자를 개량해 만든 표음문자를 반포함. (최만리가 말한 몽골 문자는 이것)
- 여진: 1119년 금 태조의 명으로 완안희윤이 만든 대자(大字)와 3대 황제 희종이 만든 소자(小字)가가 있음. 모두 한자를 이용해 만든 글자.
- 일본: 가타가나와 히라가나, 9세기경 성립된 것으로 보임. 한자의 일부분을 취하거나 변형해 만든 문자.
-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920년에 만든 대자(大字)- 한자를 변형해서 만든 표의문자, 태조의 동생인 야율질라가 만든 소자(小字)-위구르 문자를 참조해 만든 표의문자
서하, 몽골, 여진, 일본, 거란 문자는 모두 스스로 황제임을 표방한 나라에서 만들어진 문자이며, 모두 자국어 및 자국 문화에 대한 민족적 자각의 산물임. 그러나 최만리는 사대적, 중화주의적 관념을 기준으로 독자적 문자를 만든 것을 이적의 야만적 행위로 치부하고 있음.
동아시아에서 칭제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문자를 만든 나라는 조선뿐.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본다면 세종이 15세기 중엽에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음. 이는 중국 문물은 수용하면서도 우리 고유문화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문명론적 태도의 반영.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에는 자주성과 주체성이 반영되어 있다 할 수 있음.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문으로 된 책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많이 이루어졌음. Ex) 불경, 두보의 시 …
-> 이러한 작업은 우리말 가능성을 확장하는 계기가 됨.
번역작업 뿐만 아니라 국문에 의한 창작도 많이 이루어졌음. Ex) 권제, 정인지의 <용비어천가>, 세종의 <월인천강지곡> 등
-> 이를 통해 한국어 글말의 형태가 갖추어 갔음.
-> 이러한 시도들은 국문 글쓰기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문학사의 새로운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됨.
훈민정음은 한문과 달리 구두 언어와 문자언어가 합치된 글자임. 고유어와 소리의 모든 것을 형태로 정착시킬 수 있게 해주었음. 즉, 국문 글쓰기를 통해 우리 문학은 감각성, 생생한 이미지, 생기 같은 언어적 실감을 제고할 수 있게 된 것.
훈민정음 창제는 말하기, 쓰기, 읽기를 합치시켜 한국 고전문학에서 ‘낭송’의 길을 열었으며, 이 ‘낭송’은 국문소설의 창작과 향유에 큰 열었음.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조선에는 한문과 국문의 이중의 문자 체계가 존재하게 되었음. 이 두 문자 체계는 신분적, 젠더적 연관성을 가짐.
- 한문: 남성/지배층의 문자로서의 성격이 강함
- 국문: 여성/피지배층의 문자로서의 성격이 강함.
-> 하지만 이는 대체적인 것, 조선 후기로 가면 여성 중에도 한문을 읽고 쓸 수 있는 이들이 많아졌고, 지배층 남성 중에서도 국문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
조선 후기가 되면 이중의 문자 체계 내에서 국문의 위상이 더 커짐.
정철 이전의 가사[편집 | 원본 편집]
‘가사’는 고려 말의 승려인 나옹(懶翁)이 창작한 <서왕가(西往歌)>에서 비롯됨. 서왕가는 불교를 믿어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노래로, 불교 포교를 목적으로 지어짐.
(가사 내용 131쪽)
3.4조 4.4조 중심의 4음보 형식. 가사의 일반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음.
조선시대에 창작된 가사로는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이 최초의 작품. 일흔 살때 벼슬에서 물러난 후 충청도 태인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 때 <상춘곡>을 지었음.
è 산수에 은거해 봄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마음을 읊음. 사대부의 한가로운 마음을 단아하고 품격있는 언어로 잘 표현한 가사.
사대부층에는 경기체가나 시조 같은 노래 장르가 이미 있었는데, 가사를 창작한 이유.
- 시조: 인간의 내면을 간결한 형식으로 표현하는 데 적절한 장르.
- 경기체가: 정해진 자수율에 맞춰 단어를 나열함으로써 자아의 지향성을 드러냄.
-> 우리말의 서술적 구사가 어려우며, 한자어의 제시로 일관함. 이러한 장점과 제약이 있기 때문에 자아의 심회를 우리말로 자유롭게 길게 늘여 노래할 수 없음.
자아의 심회를 길게 노래하는 것에 가사라는 장르가 잘 부합하기 때문에 ‘가사’를 사대부층이 적극적으로 전유하게 되었다고 여겨짐.
정극인 다음으로 주목되는 가사 작가로는 면앙정 송순이 있음. <면앙정가>는 송순이 은거 중이던 1533년경에 창작된 것으로 보임.
-> 생동감 있게 풍경이 묘사되며, 4음보 율격으로 흥겨운 리듬이 나타남.(이전의 문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흥취.)
“넓고도 기노라 푸르거든 희지말고” ->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대목. 한시로는 이러한 우리말의 가락과 뉘앙스를 표현할 수 없음.
-> 전체적으로 우리말을 능란하게 구사하며 리듬감을 살리고 있음.
정철의 가사[편집 | 원본 편집]
정철은 송순의 제자이자 호남가단의 계승자임. 정철은 중종 31년에 태어나 선조 26년에 세상을 떴음. 10세때 부친이 유배를 따라갔으며, 12세때 경상도 영일에 유배된 부친을 다시 따라감. 16세 때 유배에서 풀려난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 창평으로 이주하였음. 벼슬길에 나가기 전까지 이 곳에서 송순, 임억령, 김인후, 기대긍 등에게 수학하였음.
25세때 <성산별곡>을 창작했으며,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가사 <관동별곡>과 시조 <훈민가> 16수를 지었음. 50세 때 대사간을 하다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함. 이 때 창평으로 귀향해 4년간 은거하면서 내놓은 작품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54세 때 ‘기축옥사’가 일어나는데, 이때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동인 숙청에 앞장섬. 당시 동인이 천 명 가까이 희생되었다고 함.
<성산별곡>[편집 | 원본 편집]
‘성산(星山)’은 전라남도 창평 땅. 우리 말로는 ‘별뫼’. 식영정(정자)과 서하당(별서(別墅))의 주인인 김성원이 성산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음.
이 작품은 우리말 구사, 특히 고유어의 구사에 있어 이전 가사 작가들의 작품을 능가하고 있음. 송순의 제자이나, 송순보다 진일보한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음.
<상춘곡>에 송죽울울리(松竹鬱鬱裏), 석양리(夕陽裏)나 <면앙정가> 무변대야(無邊大野), 악양루상(岳陽樓上) 같은 한자어가 많은 것에 비해 정철의 작품은 작품 속에 한자어도 꽤 있지만, 우리말화한 한자어가 대부분임.
또 중요한 것은 서술자와 다른 작중 인물의 말이 나온다는 점.
“어떤 지나는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 “어떤 지나는 손”은 정철 자신의 분신이고, “서하당 식영정 주인”은 김성원. 이러한 구성은 이전의 가사에서는 볼 수 없었음. <관동별곡>, <속미별곡>에서도 이러한 면모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는 정철가사의 한 특징이라고 할 만함.
<관동별곡>[편집 | 원본 편집]
<성산별곡>보다 20년 뒤에 지어졌음. 따라서 더욱 원숙한 기량을 보여줌. 우리 말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구사하여 자신의 시상을 펼치고 있음.
“부용를 꽂았난닷 백옥을 묶었난닷/동명을 박차난닷 북극을 괴왔난닷”이라는 구절에는 나열법이 구사되어 있으며, “높흘시고 망고대 외로울샤 혈망봉”이라는 구절은 대구법에 해당함.” “어와 너여이고 너 같은 이 또 있난가”는 영탄법과 의문법이 구사되고 있음.
-> 다양한 수사법을 구사함으로써 우리말의 문학 언어로서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음.
더욱 주목되는 것은 “날거든 뛰지 마나 섰거든 솟지마나”라는 구절.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형상화한 표현. “맑너든 좋지 마나 좋거든 맑지마나” 역시 산의 기운을 묘사한 말인데, ‘좋다’는 꺠끗하다의 고어임. 기운이 맑을 뿐만 아니라 깨끗하기까지 한 것을 표현한 것.
-> 정철의 뛰어난 언어감각으로 우리말의 표현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을 확인 가능함.
-> 낢과 뜀, 서 있음과 솟음, 맑음과 좋음이 서로 대비되면서도 병치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함. 이러한 ‘대비적 병치법’은 송순의 <명앙정가> “넓고도 기노라 푸르거든 희지 말고”라는 구절애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음.
-> 즉, 송순에게서 처음 나타난 단초를 정철이 더욱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음.
<관동별곡>의 흥취는 우리말의 사용에서도 기인하지만, 우리말 서술 어미의 능란한 활용도 한몫을 하고 있음.
ex) 헌사할샤, 높을시고, 외로울샤, 하도 할샤, 유정할샤 같은 단어의 -시고, -ㄹ샤는 감탄형 어미
흥취를 불러일으키고 고조하는 것에 기여하고 있음.
또, 헌사도 헌사할샤, 유정도 유정할샤와 같이 동일한 말의 반복도 이러한 효과를 낳음.
이처럼 <관동별곡>은 우리말 문학의 표현 경계를 크게 확장시키고 있음.
17세기 후반 인물인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관동별곡>을 극찬했는데,
“강원도 산수의 아름다움을 일일이 열거했으며, 멀고 궁벽하며 기괴한 경치를 다 말했다. 物象을 형용한 묘함과 언어표현의 기이함은 참으로 노래 가운데 절조(絶調)이다.”
-> 언어표현의 기이함을 언급하고 있음이 주목됨.
<사미인곡>, <속미인곡>[편집 | 원본 편집]
정철이 득의할 때 <관동별곡>을 지었다면, 이 두 작품은 실의했을 때 지어짐. 그래서 작품의 분위기도 서로 다른데, <관동별곡>이 양양하고 쾌활한 것에 비해 <사미, 속미인곡>은 비측(悲惻)의 분위기를 보여줌. 그러나 ‘애이불상(愛而不傷)’과 ‘애이불원(愛而不怨)’의 정조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성리학적 문학론에서 강조하는 ‘온유돈후’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할 수 있음.
<사미, 속미>는 연주지정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처럼 여성 화자를 내세워서 연주지정을 노래하는 작품으로는 고려 때 정서의 <정과정>이 있음.
- 동아시아에서 남성 문인이 여성 화자를 내세워 자신의 소외된, 불우한 처지를 말하는 것은 연원이 오래됨. 특히 악부시에서 흔한 형식. Ex) 이백의 장상사(長相思), 원가행(怨歌行), 대제곡(大題曲) 등
- 이러한 시 중에는 여성의 처지를 대변한 것도 있지만, 작자 자신의 처지를 우의한 것도 있음. 특히 ‘규원시’ 혹은 ‘규정시(閨情詩)’라고 하는 떠난 님을 그리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 혼자있는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읊는 한시들이 주목됨.
-> <사미, 속미인곡>은 한시의 이런 전통을 활용해 긴 우리말 노래를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음.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ᄒᆞᆫᄉᆡᆼ 緣分(연분)이며 하ᄂᆞᆯ 모ᄅᆞᆯ 일이런가.
나 ᄒᆞ나 졈어 닛고 님 ᄒᆞ나 날 괴시니,
이 ᄆᆞ음 이 ᄉᆞ랑 견졸 ᄃᆡ 노여 업다.
平生(평ᄉᆡᆼ)애 願(원)ᄒᆞ요ᄃᆡ ᄒᆞᆫᄃᆡ 녜자 ᄒᆞ얏더니,
늙거야 므ᄉᆞ 일로 외오 두고 글이ᄂᆞᆫ고.
엇그제 님을 뫼셔 廣寒殿(광한뎐)의 올낫더니,
그더ᄃᆡ 엇디ᄒᆞ야 下界(하계)예 ᄂᆞ려오니,
올 적의 비슨 머리 얼킈연디 三年(삼년)이라.
-> ‘광한전’은 옥황상제의 궁이고, ‘하계’는 인간 세상을 말함. 작품 서두에서부터 님과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는 것.
臙脂粉(연지분) 잇ᄂᆡ마ᄂᆞᆫ 눌 위ᄒᆞ야 고이 ᄒᆞᆯ고.
ᄆᆞ음의 ᄆᆡ친 설음 疊疊(텹텹)이 ᄡᅡ여 이셔,
짓ᄂᆞ니 한숨이오 디ᄂᆞ니 눈믈이라.
人生(인ᄉᆡᆼ)은 有限(유ᄒᆞᆫ)ᄒᆞᆫᄃᆡ 시ᄅᆞᆷ도 그지 업다.
-> 독수공방하여 상심한 처지를 노래함.
<속미인곡>은 서정 자아인 ‘나’와 어떤 여인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음.
뎨 가ᄂᆞᆫ 뎌 각시 본 듯도 ᄒᆞᆫ뎌이고
天텬上샹 白ᄇᆡᆨ玉옥京경을 엇디ᄒᆞ야 離니別별ᄒᆞ고
ᄒᆡ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러 가시ᄂᆞᆫ고
-> ‘백옥경’은 옥황상제가 사는 곳을 이름.
어떤 여인의 말 이후 ‘나’의 긴 사설이 나옴.
春츈寒한苦고熱열은 엇디ᄒᆞ야 디내시며
秋츄日일冬동天쳔은 뉘라셔 뫼셧ᄂᆞᆫ고
粥죽早조飯반 朝죠夕석 뫼 녜와 ᄀᆞᆺ티 셰시ᄂᆞᆫ가
기나긴 밤의 ᄌᆞᆷ은 엇디 자시ᄂᆞᆫ고
-> 임에 대한 극진한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
<사미, 속미인곡>에 나오는 ‘광한전’, ‘백옥경’ 임금이 있는 궁궐을 암시하는 대목. 두 작품 모두 우리말의 유려하고 곡진한 구사를 보여주지만, <관동별곡>만큼의 실감나고 핍진한 표현미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음.
이는 <관동별곡>이 진실한 마음과 흥취로 지어진 것인 반면 두 미인곡은 임금에 대한 진정이 아닌 일종의 아유(아첨)이기 때문으로 보임. 아유는 ‘작위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 님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으나 생동감이 부족하고, 관념적이며, 박제된 여성을 그리는 것으로 귀결됨.
(서포 김만중(을 비롯한 서인 문인들)은 정철의 전후미인곡을 굴원의 <이소>에 견주고 있으나, <이소>는 아유문학이 아니므로 군주에 대한 충성, 원망, 실망으로 인한 깊은 번뇌 등이 담겨 있고 진정성과 감동을 줌. 그러나 전후미인곡에는 이런 것이 없음. )
가람본 <청구영언>에 수록된 <상사별곡>과 비교하면 이러한 점이 더 잘 드러남.
인간리별(人間離別) 만사중(萬事中)에 독수공방(獨守空房)이 더욱 셟다.
상사불견(相思不見) 이 진정(眞情)을 졔 뉘라서 짐작하리
친 시름 허튼근심 근심 다 후루혀 던져두고
자나나 나자나 임을 못보와 가답답
얼인 양자(樣姿) 고은소래 눈에 암암(黯黯) 귀에 쟁쟁(錚錚)
보고지고 임의 얼골 듯고지고 임의 소
비이다 하날님 임 생기라 비나이다.
전생차생(前生此生)이라 무 죄(罪)로 우리 두리 삼겨나셔
잇지마자 처음 세 죽지마자 백년기약(百年期約)
천금같이 믿엇드니 세상일에 마(魔)가 많다.
천금주옥(千金珠玉) 귀 밧기오 세상빈부(世上貧富) 관겨랴
근원(根源) 흘너 물이 되여 깁고깁고 다시 깁고
랑 무어 뫼히되야 놉고놉고 다시 놉하
문허질줄 모르거든 허질줄 졔뉘알니
일조낭군(一朝郞君) 이별후의 소식(消息)조차 돈절(頓絶)니
오늘올 내일올 그린지도 오거라
일월무정(一月無情) 졀노가니 옥안운발(玉顔雲髮) 공로(空老)로다
이별이 불이 되어 태우느니 간장(肝腸)이다
나며들며 빈 방 안에 다만 숨이로다
인간니별(人間離別) 만사중(萬事中)의 나 갓튼이 이슬가
바람부러 구룸되야 구름 져문날의
나며들며 빈 방으로 오락가락 혼자 안져
임 계신 바라보니 이 상사(相思) 허사(虛事)로다
공방미인(空房美人) 독상사(獨相思)가 녜로붓터 이러가
랑 긋것 임도 날 각가
날 랑 랑려가
만천청산(萬疊靑山) 들어간들 어늬 랑군(郞君) 날 찾으리
산(山)은 첩첩(疊疊) 고개되고 물은 충충 소(沼)이로다
오동추야(梧桐秋夜) 밝은 달에 님 생각이 새로 왜라
무정(無情)하여 그러한가 유정(有情)야 이러가
산계야목(山鷄夜鶩) 길을 려 도라올줄 모로난가
노류장화(路柳墻花) 어쥐고 춘색(春色)으로 단기가
가길 자최업셔 오는길 무듸거다
번 죽어 도라가면 다시 오기 어려오리
녯 정(情)이 잇거든 다시 보게 삼기소셔
è 님과 이별한 감정을 노래하고 있으나, 전후미인곡과는 달리 사랑의 ‘실감’이 느껴짐. 전후 미인곡이 사대부여성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고, <상사별곡>은 시정 여성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라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음.
정철의 전후미인곡 창작에는 권력에 대한 그의 집착이 바탕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자의 의식, 무의식이 작품내의 부작위와 아유를 낳게 됨.
정철의 시조[편집 | 원본 편집]
정철은 가사뿐만 아니라 시조도 창작하였음.
<훈민가>는 백성을 가르치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백성 교화를 위해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음.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쟈스라
내 논 다 매여든 네 논 졈 매여 주마
올 길에 뽕 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스라. 제13수
-> 백성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라 어려운 어휘의 구사가 없고, 평이한 우리말을 사용해 정감있고 잘 짜인 시조를 지어남.
상륙(象陸) 장긔 하지 마라 송사 글월 하지 마라
집 배야 무슴 하며 남의 원수 될 줄 어찌
나라히 법을 세우샤 죄 있는 줄 모르난다. 제15수
-> 쌍륙은 두 개의 주사위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 글월은 소송하는 글, 배다는 망하다라는 뜻.
<훈민가>는 유교적 윤리관에 따라 백성을 훈도하고자 하는 면모가 두드러짐.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강한 노래. 그럼에도 유교 관념이나 이념을 노출하기 보다, 백성의 일상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윤리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는 점이 주목됨.
15수의 중장을 보면 ‘어찌’ 뒤에 서술어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이 서술어를 종장 맨 끝에 배치해 절묘하게 언어를 구사하였음. 우리말로 문학 하기의 경지를 올림.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저멋거니 돌이라 무거울가
늙기도 설웨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가. 제16수
-> 힘들게 짐을 지고가는 늙은이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름.
박인로의 <누항사>[편집 | 원본 편집]
노계(蘆溪) 박인로는 명종 16년에 태어나 인조 20년에 생을 마감함. 무인 출신. 여러 작품 중 주목되는 것은 <누항사(陋巷詞)>.
- 누항(陋巷): 가난한 사람이 사는 좁고 너절한 골목, <누항사>에서는 빈한한 작가가 거주하는 공간을 가리킴.
박인로는 51세에 <누항사>를 창작했는데, 문집 <노계집>에 창작 배경이 드러남.
공은 한음(漢陰) 상공(相公)을 좇아 노닐었는데, 상공이 공에게 산에서 거주하는 곤궁한 형편이 어떤가 묻자 공이 자신의 심회를 서술하여 이 곡을 지었다.
-> 한음은 이덕형(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냄.)을 말함. <누항사>에는 빈이무원, 안빈낙도의 가치관이 표명되어 있음.
한기태심(旱旣太甚)야 시절(時節)이 다 느즌 졔,
서주(西疇) 놉흔 논애 잠 녈비예
도상(道上) 무원수(無源水)를 반만 혀두고,
쇼 젹 듀마 고 엄섬이 말삼
친절(親切)호라 너긴 집의 업슨 황혼(黃昏)의 허위허위 다라 가셔,
구디 다 문(門) 밧긔 어득히 혼자 서셔
큰 기 아함이를 양구(良久)토록 온 후(後)에,
어와 긔 뉘신고 염치(廉恥) 업산 옵노라.
초경(初更)도 거읜 긔 엇지 와 겨신고.
연년(年年)에 이러기 구차(苟且) 줄 알건마
쇼 업 궁가(窮家)애 혜염 만하 왓삽노라.
공니나 갑시나 주엄 즉도 다마,
다만 어제 밤의 거넨 집 져 사이,
목 불근 수기치(雉)을 옥지읍(玉脂泣)게 어 고,
간 이근 삼해주(三亥酒)을 취(醉)토록 권(勸)거든,
이러한 은혜(恩惠)을 어이 아니 갑흘넌고.
내일(來日)로 주마 고 큰 언약(言約) 야거든,
실약(失約)이 미편(未便)니 사셜이 어려왜라.
실위(實爲) 그러면 혈마 어이고.
헌 먼덕 수기 스고 측 업슨 집신에 설피설피 물너 오니,
풍채(風採) 저근 형용(形容)애 즈칠 이로다.
-> ‘나’는 봄에 논을 갈아야 하는데, 가난해 소가 없고, 소가 있는 집에 가서 빌리려고 해도 상황이 여의치 않음.
정철의 가사와는 달리 한기태심(旱氣太甚), 도상무원수(道上無源水) 같은 한문 어구가 보임. 우리 말 노래에는 한문 어구가 많이 나오면 우리 말의 표현력이 위축되어 작품성이 떨어지게 됨.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누항사>는 정철의 가사와는 다른 우리말 구사를 보여줌.
Ex) ‘허위허위(힘에 겨운 걸음걸이로 애써 걷는 모습)’, ‘어득히(막막하게)’, ‘설피설피(어설프다. 언행이 덜렁덜렁하고 거친 모습)’ 같은 부사어
-> ‘나’가 한미한 양반이기 때문에 구사될 수 있던 어휘. 정철은 지체 높은 양반이라 이러한 어휘를 쓰지 않음. 언어의 계층성을 보여줌.
또한 아함(어흠, 뭣도 없으면서 위엄을 부리는 서정 자아의 태도를 드러냄), 멍덕(짚으로 만든 삿갓), 축(신발 뒷축)과 같은 명사어들도 언어의 계층성을 보여줌.
이러한 부사어와 명사어는 모두 우리 고유어이며, 정철 같은 상층 양반이 아니라 하층 양반이기 때문에 구사할 수 있는 어휘였음. -> 즉, 박인로는 정철과는 다른 위치에서 우리 말의 문학적 경계를 확장하는 것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음.
<누항사>는 곤궁한 하층 양반의 현실을 가사에 담고 있음. 구체적 생활 세계, 삶의 절박한 모습을 담은 가사는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학사 상 새로운 성취를 보여준다 할 수 있음.
윤선도의 <어부사시사>[편집 | 원본 편집]
고산(孤山) 윤선도는 선조 20년에 태어나 현종 12년에 생을 마감함. 정철보다 51년 뒤, 박인로보다 26년 뒤에 태어났음. 정철은 서인이었지만, 윤선도는 남인임.
윤선도는 1628년 문과에 급제해서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고, 이후 병자호란 때 임금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제주도에 은거하려고 배를 타고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완도의 보길도에 들렀다가 ㅊ풍광에 반해 이곳에 은거하게 됨. 은거지 일대를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여러 채의 집과 정자를 지어 놓고 풍류를 즐김. 윤선도는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이 많아 엄청난 부자였음. 그의 ‘풍류’ 배경에 경제력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됨.
효종 2년 65세에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창작함. 윤선도는 서인과 대립해 여러 차례 유배됨, 유배 기간만 도합 20년이고, 은거 기간은 19년임.
<어부사시사>는 대체로 연시조로 보지만, 난점이 있어 시조가 아니라 어부가 계열의 독자적인 노래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함.
1. 율격이 시조와 차이가 있음
2. 시조와 달리 여음(餘音)이 있음
<어부사시사>는 이현보의 <어부가>에서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는데, <어부가>는 장가 9장과 단가 5장이 있음.
-> <어부가>는 일반 백성들이 알기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했고, 여음구를 제외하고는 우리말 토가 있는 한시의 칠언절구 형태로 지어졌음. (내용 154~155쪽)
<어부사시사>는 이와 달리 우리말 고유어가 풍부하게 구사되고 있음
압 개예 안ᄀᆡ 것고 뒷 뫼희 ᄒᆡ 비췬다
ᄇᆡ ᄠᅥ라 ᄇᆡ ᄠᅥ라
밤믈은 거의 디고 낫믈이 미러 온다
지국총(至匊悤) 지국총(至匊悤) 어ᄉᆞ와(於思臥)
강촌(江村) 온갓 고지 먼 빗치 더옥 됴타
-> 한자어는 ‘강촌’ 하나뿐이지만, 이마저도 우리말 화한 한자어에 해당함. ‘먼 빛’이라는 우리 말은 독특한 뉘앙스의 고유어임. 우리말 단어들에 의해 풍경이 정취 있게 눈 앞에 그려지는 듯 묘사됨.
우ᄂᆞᆫ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ᄃᆞᆯ숩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漁村) 두어 집이 ᄂᆡᆺ 속의 나락 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ᄉᆞ와
말가ᄒᆞᆫ 기픈 소(沼)희 온갓 고기 ᄠᅱ노ᄂᆞ다
-> 한자어는 ‘어촌’, ‘소’ 밖에 없지만 우리말 화한 한자어임.
푸른 숲에서 뻐꾸기가 우는 광경을 의문형으로 표현함으로써 풍경을 창조적으로 전유해 묘미있게 표현하고 있음.
-> “나락들락”이라는 표현도 ‘보이고 안보이는’ 상태를 ‘나고 드는’동작으로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묘미 있음.
윤선도는 <어부사시사>를 통해 자연 속에서 노니는 사대부의 한정(閑情)을 노래하고 있으나, “두어라 초강(楚江)에 가자하니 오복충혼(魚腹忠魂) 낚을세라”를 보면 윤선도가 아직 정치에 대한 관심, 세상에 대한 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 초강은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 참소를 입어 조정에서 쫓겨난 뒤 몸을 던진 벽라수를 가리킴.
- ‘어복충혼’은 굴원이 물에 빠져 죽어 물고기 밥이 되었으므로 굴원의 충성스러운 넋을 가리킴.
-> 즉, 굴원이 소환되고 있다는 점에서 <어부사시사>를 세상을 벗어난 사대부의 한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줌.
<어부사시사>는 어쩔 수 없이 은거하게 된 자의 ‘자기소견적(自己消遣的: 스스로를 위로함)’ 문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임. 따라서 ‘어부’가 순전한 관념이고, 실제의 어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
사대부들의 국문시가 창작[편집 | 원본 편집]
신라시대 지배층들은 향찰로 표기된 향가를 창작하고 향유햐였음. 신라 말에 한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당시는 우리말 노래에 대한 천시가 없었음
그러나 신라 말부터 ‘시’와 ‘가’에 대한 분리적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임.
고려시대에는 신라보다 한문학의 비중이 더 커졌고, 이에 따라 시는 더 높은 장르로, 가는 상대적으로 낮은 장르로 엄격히 분리되게 됨.
조선 초인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에도 이러한 통념은 이어졌지만, ‘가’가 국문으로 표기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생겼음. 이중문자체계가 생긴 것.
조선 시대의 문인들이 국문시가를 지은 것은 이중 문자 체계와 관련된 딜레마가 원인이 되었음.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 달라 읊을 수는 있으나 노래를 할 수는 없다. 만일 노래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리말로 엮지 않을 수 없다.”라는 이황의 도산십이곡 발문에서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음.
-> 노래는 한시가 아닌 자국어로만 가능하다. 노래를 할 수 없다는 점이 지배층들이 국문 시가를 짓는 원인이 됨.
-> 시, 한시는 ‘개념적 인식’이 문제가 되지만, ‘가’, 노래는 가락이 있어 몸이 반응하게 됨. 즉, 시와 노래는 이를 짓거나 읊는 사람의 내적 요구에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
-> 정서적, 실존적으로 절박하고 맺힌 것을 풀고자 하는 내적 욕구가 강렬할 때, 흥취나 신명과 같은 고양된 정서를 발산하고 싶을 때 시보다 노래가 더 어울리게 됨.
-> 즉, 한시로는 해소될 수 없는 어떠한 내적 욕구가 노래로는 해소될 수 있기 때문에 문인들은 노래를 지은 것.